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마치 그때 그 시절의 약속처럼 새하얀 침묵 속에 세상 모든 소음을 삼키고 있었다. 지우는 얼어붙은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꽃 하나가, 기어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 그녀의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오래된 저택의 거실은 여전히 찬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벽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닥거리며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그 온기는 지우의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이지 못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이 공간은 그녀가 애써 외면했던 과거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낡은 피아노 위에는 먼지 앉은 악보가 놓여 있었고, 삐걱거리는 마루 바닥은 발걸음마다 서글픈 소리를 냈다.
“늦었구나.”
지우는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흘러간 시간에 대한 나지막한 탄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 의자는 하준이 늘 앉던 자리였다. 그때는 그가 이토록 먼 길을 돌아 다시 제 앞에 나타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시간이 멈춘 공간
낡은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시간은, 사실 홀로 지독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우는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사진첩을 집어 들었다. 바랜 사진 속에는 눈부시게 웃고 있는 어린 그녀와 하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 있는, 해맑게 웃던 ‘그 아이’.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약속을 했다.’
지우의 손가락이 사진 속 하준의 얼굴을 스쳤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저 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믿었고, 영원히 지켜주겠노라 맹세했다. 그러나 세상은 잔혹했고, 그 맹세는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약속의 파편들은 그녀의 가슴에 박혀, 지독한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사진첩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들어선 하준의 얼굴은,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소년의 모습과 겹쳐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깊어졌고, 그의 어깨는 더 무거워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 하준의 목소리도 낮고 차분했다. 어쩐지 그의 말 속에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압축되어 있는 듯했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 막 포기하려던 참이었어.” 지우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하준은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쬐었다. 그의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지우는 여전히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저택, 그리고 그 저택에 얽힌 지독한 운명을 끊어내기 위해서.
다시 찾아온 눈꽃
“그때 그 약속, 기억해?” 하준이 불쑥 물었다. 그는 지우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기억하느냐고? 그 약속은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족쇄이자, 동시에 유일한 빛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있을 리가.”
하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었다. “그 약속, 이제 지켜야 할 때가 왔어.”
그의 말에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끔찍했던 과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잊으려 애썼던 상처들을 다시 헤집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우리는 이미 모든 걸 잃었어.” 지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희망의 끈을 놓으려 했다. 그래야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하준은 지우에게로 다가와, 굳게 닫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뜨거웠다. “아니. 아직 포기할 수 없어. 어제, 그 정보를 얻었어. ‘그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우리가 가진 마지막 기회야.”
‘그 사람.’ 지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이름은 그녀에게 공포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감당해야 해.” 하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해. 다시는 잃을 수 없어.”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송이가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 그 겨울처럼, 세상은 다시 눈꽃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 하얀 눈 속에서, 지우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순수하고 용감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하준이 있었다.
지우는 하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망설임은 사라지고, 오직 결의만이 남았다. 그녀는 알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이 오랜 싸움의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을. 설령 그 끝이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자.” 지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이번에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낼 거야.”
하준은 지우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과거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는 듯한, 쓸쓸하면서도 희망적인 미소였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다가올 폭풍우를 예고하는 것처럼. 지우는 다시 사진첩을 펼쳤다. 사진 속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그녀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속삭였다. ‘기다려 줘. 이번에는, 꼭 너를 지켜줄게.’
그녀의 눈빛은 차가운 눈꽃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제639화,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