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은 잿빛 초고층 빌딩과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숲이었다. 그러나 리나는 그 거대한 숲의 그림자 아래, 시간의 파편처럼 잊힌 골목길로 들어섰다. 낡은 벽돌 건물들 사이, 덧대어진 녹슨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이곳은 미래 도시의 일부이면서도, 마치 과거의 한 페이지가 통째로 떨어져 나와 붙여진 것 같은 기이한 장소였다.
며칠 전, 그녀가 발견한 오래된 홀로그램 메시지는 오직 한 줄의 문장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가리킨 좌표는 다름 아닌 이곳, 시간의 흐름조차 비껴간 듯한 낡은 전파탑 기지였다. 리나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미한 희망과 익숙한 불안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지난 수십 번의 좌절과 예상치 못한 단서들 속에서, 그녀는 늘 이 기묘한 흥분 상태를 견뎌왔다.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내부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인 낡은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은 그녀의 시대조차 아득히 넘어선 구식 통신 장비들처럼 보였다. 리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메시지는 이곳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고 암시했다. 시작점. 대체 무엇의 시작점이란 말인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의 시작? 아니면 더 큰 계획의 시작?
저 안쪽,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낡은 콘솔에 그녀의 시선이 멈췄다. 다른 장비들과 달리, 콘솔의 한쪽 구석에서 희미한 녹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 불빛은 리나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콘솔 위의 먼지를 털어냈다. 닳고 닳은 키패드, 그리고 중앙에 박힌 작은 액정 화면. 손을 뻗어 녹색 불빛이 나오는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잠시 깜빡이더니 알 수 없는 코드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텅 빈 화면 중앙에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코드명: 오리온. 임무: 망각.>
그 순간, 머릿속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뇌를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과 함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주선 내부의 흰색 복도, 긴급 상황을 알리는 붉은 경보등, 그리고 누군가의 절규. 자신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푸른 행성이 아득히 빛나고 있었다. 푸른 행성… 자신의 고향. 그리고 그 행성을 향해 돌진하는 거대한 운석의 그림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리나! 시간이 없어! 기억 지우기 프로토콜을 실행해야 해! 우리가… 우리가 마지막 기회야!”
그녀의 손이 떨렸다. 화면 속 문자를 읽는 동시에, 그녀의 심장은 마치 과거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 격렬하게 뛰었다. ‘망각’.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임무였다고? 무엇을 잊어야만 했던 걸까? 왜?
기억의 파편이 점차 선명해졌다. 자신은, 아니 ‘리나’라는 코드명을 가진 자신은, 지구를 위협하는 거대한 재앙을 막기 위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여행자였다. 그리고 그 임무는, 특정한 정보를 미래로부터 과거로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그 정보가 시공간의 흐름에 오류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봉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아득히 먼 과거의 자신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 아니라, 거대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대가’였던 것이다.
콘솔 화면이 다시 깜빡였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기억 봉인 완료. 후속 임무: 다음 좌표로 이동. 목표: 동조자 ‘카이’를 찾아라.>
리나는 망연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망각의 임무는 완료되었지만, 그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진정한 시작점에 도착한 것이었다. 동조자 카이? 그 이름은 그녀의 머릿속에 아무런 메아리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기억 상실이 우연이 아니었으며, 그녀에게는 아직 완수해야 할 중대한 목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낡은 철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는 규칙적이고 조용했다. 리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감춰둔 칼자루를 잡았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안감이 아닌, 팽팽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군, 코드명 오리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리나는 그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비웃음과 오래된 친밀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차가운 눈빛과 날카로운 턱선.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이리 낯설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 남자는…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일지도 몰랐다.
“너는… 누구지?” 리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남자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콘솔 화면 속 ‘카이’라는 이름처럼,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깊고 아득했다.
“나는 너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돕는 자이면서, 동시에 너의 임무를 방해하는 자다. 내 이름은… 네가 찾고 있는 그 이름과 같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은 리나의 등 뒤, 콘솔 화면 속 ‘카이’라는 글자에 머물렀다. 리나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모든 것이 시작점으로 돌아왔지만, 그 시작점은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