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650화

깊어가는 밤, 도시의 불빛들이 저 멀리 수채화처럼 번져가는 시간. 창밖으로는 까만 벨벳 위에 뿌려진 은가루처럼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별들이 빛나는 밤, 주파수 93.9MHz, 여기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벌써 650번째 밤이네요. 이 긴 여정을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DJ 지호입니다.

제 목소리가 여러분의 고요한 밤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한 통의 사연을 열어봅니다. 이 사연은 익명을 요청하신 윤서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여름밤의 약속

“지호님, 안녕하세요. 저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아니, 어쩌면 잊고 싶지 않은 어떤 날들의 기억을 털어놓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십여 년 전,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저는 옥상 위 별들을 사랑하는 아이였습니다. 도시의 빛 공해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집 옥상에서는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거든요. 비밀스러운 저만의 천문대였죠.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현우를 만났습니다. 같은 반이었지만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섞지 않던 현우가 어느 날 밤, 망원경을 들고 옥상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놀라움이란….”

지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미소를 지었다.
“아, 상상만 해도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옥상 위의 비밀스러운 만남이라니. 별들이 지켜보는 무대였겠죠.”

“현우는 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제게 계절마다 바뀌는 별자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우주의 신비에 매료되었습니다. 사자자리 유성우가 쏟아지던 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떨어지는 별똥별을 세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거창한 꿈들을 이야기했고, 저는 그저 그의 곁에서 영원히 이 별들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어린 사랑은 언제나 미숙하고, 작은 오해에도 쉽게 흔들리는 법이더군요.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이 커져버렸습니다. 저는 자존심 때문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현우는 답답한 마음에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제 귀에 선명합니다. ‘네 마음이 정말 저 별들처럼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상처받은 저는 그를 붙잡기는커녕, ‘그래, 변하면 어때?’ 하고 대답하고 말았죠.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사연을 읽는 지호의 목소리에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참, 어린 시절의 우리는 왜 그렇게 서투르고 완고했을까요?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가 많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후로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다른 도시에서 살아가며 평범한 일상을 보냈죠. 옥상 위의 별들은 이제 제게 아련한 추억의 조각이 되었고요. 하지만 작년 여름, 친구 결혼식 때문에 잠시 고향에 들렀을 때, 저는 우연히 옛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제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고, 무심코 올려다본 옥상에는 여전히 작은 철문이 녹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아무도 모르게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전처럼 별이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밤하늘이 저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현우가 저에게 알려주었던 ‘알비레오’라는 별을 찾았습니다. 백조자리 부리에 위치한 아름다운 이중성. 그는 늘 제게 말했었죠. ‘서로 다른 색깔을 가졌지만, 영원히 함께 빛나는 별들처럼 우리도 변치 말자.’”

“그 순간,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감정들이 저를 덮쳐왔습니다.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그를 향한 미안함이요. 저는 왜 그때 그의 손을 잡지 못했을까요? 왜 마지막까지 바보 같은 자존심을 부렸을까요? 변치 말자던 그의 말이, 제게는 너무 무겁게 들렸던 걸까요. 어쩌면 저는 영원이라는 약속이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지호는 잠시 사연 읽기를 멈추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깔았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듣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 우리를 휩싸는 감정들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아득하게 다가오죠. 특히 어린 시절의 순수한 약속들은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밤하늘에 띄운 마음

“저는 요즘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별을 봅니다. 이제는 스마트폰 앱의 도움을 받아야 별자리를 겨우 찾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현우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그는 저를 기억할까요? 아니, 어쩌면 저를 완전히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죠. 저는 그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가끔은 그도 제가 알려주었던 별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호님, 저는 이제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늦었을 수도 있겠죠. 그저 이 라디오를 통해 제 목소리가, 제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이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듣고 있는 것처럼, 현우도 혹시 이 라디오를 듣고 있지 않을까요? 그가 혹시 이 사연을 듣는다면… 그 여름밤의 약속이, 그 별들이 여전히 제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사연은 여기까지였다. 지호는 윤서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마지막 문장을 조용히 되뇌었다.
“그때 미안했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지호는 마이크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님, 당신의 이야기는 많은 분의 마음을 울렸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속에 묻어둔 ‘현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용기가 없어, 혹은 때를 놓쳐서 전하지 못한 말들.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꺼내 보이는 진심.”

“우리가 이 라디오를 통해 수많은 사연을 나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잊었던 마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요. 밤하늘의 별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처럼, 변치 않는 마음 또한 분명 존재할 겁니다.”

“윤서님의 진심이 담긴 이 목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흘러 현우님에게 닿기를 저도 간절히 바라봅니다. 어쩌면 그도 지금 이 시간, 어딘가에서 별들을 올려다보며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지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곡을 소개했다.
“어린 시절의 약속과 후회, 그리고 다시금 피어나는 희망을 담은 윤서님의 사연에 어울리는 곡입니다. 빛바랜 기억 속에서 빛을 찾아 다시 나아가는 모든 분께 이 노래를 바칩니다. 스윗소로우의 ‘별이 진다네’입니다.”

음악이 스튜디오를 채우고, 지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윤서님과 현우님이 같은 별을 보고 있기를. 그렇게 염원하며, 제650화의 막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다음 주파수에서 다시 만날 밤을 기약하며,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