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밤, 창밖으로는 비가 내렸다. 토독, 토독. 낡은 창틀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지훈의 마음속 오랜 회한을 촉촉이 적시는 듯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창가에 앉아 어둠 속으로 스러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옅은 김은 오래전에 식어버렸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고요한 존재, 달이 앉아 있었다.
달은 지훈의 발치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지만, 그 작은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불안한 마음이 달에게도 전이된 것처럼. 달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지훈을 올려다보곤 했다. 깊고 노란 눈동자는 우주의 축소판 같아서, 그 안에 지훈의 모든 고뇌가 비치는 듯했다.
잊혀진 이름, 다시 찾아온 메아리
“달아…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아.” 지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힐 듯 희미했다. “잊고 살았다 생각했는데, 문득 다시 찾아오네. 그것도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가 들고 있던 낡은 휴대폰 액정에는 한 통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어제저녁, 전혀 모르는 번호로 온 짧은 안부. 그러나 그 발신자의 이름은 지훈의 심장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미연’.
강미연. 잊은 줄 알았던 이름이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좌절, 순수한 꿈과 씁쓸한 이별이 한데 뒤섞인 채 그의 기억 저편에 봉인되어 있던 이름. 20년도 더 된 과거의 메아리가 이렇게 불쑥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훈은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평범한 안부 인사 뒤에 조심스럽게 덧붙여진 한마디. ‘혹시 시간 괜찮으면, 차 한잔하고 싶어서요.’
달은 부드러운 꼬리를 한번 살랑이더니,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지훈의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처럼.
“두려운 것이냐, 인간의 벗이여?”
지훈은 피식 웃었다. 언제나처럼 달은 그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두렵다기보다는… 복잡해. 내가 지금껏 쌓아온 평화로운 일상이 깨질까 봐. 아니면, 그때의 내가 너무도 나약하고 어리석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까 봐. 어떤 감정을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
달의 지혜, 시간의 강물
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훈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부드러운 털이 그의 바지에 닿았다. 달은 몸을 기대 지훈의 손등에 제 머리를 비볐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은 지훈의 심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시간은 강물과 같지.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물이 만든 강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품지.” 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존재.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 또한 다른 존재일 터.”
지훈은 달의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미연과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함께 꿈꾸었던 작은 공방, 실패로 끝난 첫 전시회, 그리고 헤어지던 날의 차갑고 서먹했던 얼굴들. 그 모든 것이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아려왔다. 그는 그때의 자신을 너무나도 한심하게 여겼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미연의 꿈까지 무너뜨렸다는 죄책감이 언제나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실패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 지훈이 힘없이 말했다. “그건 마치 오래된 상처의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는 일 같을 거야. 아프기만 할 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지도 몰라.”
달은 그의 손등을 핥았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지훈의 피부에 와닿았다. “딱지를 떼어내야만 새살이 돋는 상처도 있는 법. 두려움에 가려진 채, 영원히 곪아가는 것보다는 나을지니.” 달은 말을 이었다. “어떤 만남이든, 그 안에는 반드시 새로운 길이 깃들어 있지, 지훈. 그 길이 너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과거의 그림자에 갇혀 새로운 빛을 외면하는 것이 진정 너의 평화인가?”
선택의 기로
지훈은 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빛. 그는 지금껏 과거의 상처가 주는 안정감, 즉 익숙한 고통 속에 갇혀 살았던 것일까. 그는 미연을 만나면 또다시 아플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 두려움이 사실은 스스로를 더 깊은 고독 속에 가두는 벽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달의 말을 통해 깨달았다.
“그럼 난… 뭘 해야 하는 걸까, 달아?”
달은 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그 노란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판단이나 비난도 없었다. 오직 잔잔한 이해와 깨달음을 향한 인도만이 있을 뿐.
“네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따르라.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평화일 것이며, 마주하고 싶다면 마주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찾는 길일지니.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타인의 시선이나 과거의 망령이 아닌, 오롯이 너의 현재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훈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미연의 메시지.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망설였다. 거절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볼까? 2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그때는 실패 앞에서 좌절하고 숨기 급급했지만, 지금 그는 달과 함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삶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사람이 아닌가.
그래, 그래야 했다. 두려워하고 숨는 것은 더 이상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혹시 아는가. 그 오랜 상처가 실은 제대로 아물지 않은 채, 그저 덮여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제대로 치유할 때라는 것을.
지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미연 씨. 차 한잔… 좋습니다. 언제 시간이 괜찮으세요?’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자, 그의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불안함보다는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실려 들어오는 희망의 작은 조각 같았다.
달은 지훈의 무릎 위에서 편안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회한이나 불안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지만 분명한 리듬처럼 들려왔다.
지훈은 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의 불안했던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한 발짝 내디딜 용기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곁을 지켜주는 작은 존재, 달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