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제 겨우 조각을 맞춘 듯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또다시 흩어져 버렸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갈증뿐이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같기도, 혹은 자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안, 괜찮아?”
수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둠을 걷어내듯 다가왔다. 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 수아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이안의 흔들리는 세계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등대였다.
“또 그 꿈인가 봐.” 이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떤 여인의 뒷모습… 그리고 거대한, 차가운 기계 장치… 내가 그걸 보고 울고 있었어.”
수아는 이안의 옆에 앉아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좋은 징조일 수도 있어.”
“아니, 아니야.”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선명해질수록 더 고통스러워. 난 왜 그걸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내가 뭘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슬픔만 남아있어.”
수아는 아무 말 없이 이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는 이안의 기억 상실이 단순한 뇌 손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진 고통스러운 흔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이안이 원래 속했던 시간대와 지금의 시간대를 잇는 유일한 단서라는 것도.
그들은 2342년의 낡은 지하 벙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시간 관리국’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시간 이동은 금지되었고, 과거의 모든 변수는 철저히 제거되었다. 이안은 그 관리국의 감시망을 뚫고 온 유일한 ‘변수’였다. 하지만 이안 자신은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 벙커의 스피커에서 사령관 류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집결하라. 긴급 상황이다.”
이안과 수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류 사령관이 이토록 다급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
작전실은 싸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낡은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중앙에 거대한 청사진을 띄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보아왔던 어떤 무기보다도 거대하고 위협적이었다.
“시간 관리국이 ‘시간 균열 봉쇄 장치’의 최종 가동을 시작하려 합니다.” 류 사령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눈빛만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간 균열 봉쇄 장치라고요?” 수아가 되물었다. “그건 전설 속에서나 듣던 병기 아닌가요? 수백 년 전, 시간 이동이 막 시작될 무렵에 폐기되었다고….”
“폐기된 것이 아니라, 봉인된 것이었지.” 류 사령관은 한숨을 쉬었다. “시간 관리국은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모든 시간 이탈자들을 영원히 가두기 위해, 이 장치를 재가동하려 하고 있다. 일단 가동되면, 모든 시간 균열은 폐쇄되고, 시간 이동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안은 홀로그램 속 거대한 기계 장치를 응시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어째서인지, 그 기계는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차갑고, 거대하고, 그리고… 끔찍하게 슬픈.
“그 말은….” 한 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이안이 이곳에 갇히게 되면,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류 사령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안뿐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 저항 세력의 몇몇 시간 이탈자들도 모두 이곳에 고립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이곳에 묶인다면, 이안의 본래 임무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된다.”
이안의 머릿속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임무’.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그 중요한 임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존재 이유였을까?
“저 장치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수아가 절박하게 물었다.
류 사령관은 홀로그램을 확대했다. 장치의 중심부에는 복잡한 회로가 번개처럼 얽혀 있었다. “이 장치를 완전히 멈추려면, 핵심 동력원을 차단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핵심 동력원은 오직 ‘특정 시간 이동자의 고유한 시간 파장’에 의해서만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시간의 열쇠’라고 불리는 존재.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이안이 그 ‘열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안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자신이, 그 거대한 파괴 장치의 열쇠라고? 혼란스러운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한번 폭풍처럼 몰아쳤다. 꿈속의 여인, 슬픔, 그리고 기계 장치…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안?” 수아가 이안의 어깨를 잡았다.
이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끔찍한 진실의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의 무게. 그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진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장벽이었던 것이다.
“저 장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안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류 사령관은 지도를 펼쳤다. “지금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옛 지상 연방 수도였던 ‘에테르움’ 유적지 지하에 숨겨져 있다. 시간 관리국의 가장 삼엄한 경비가 배치된 곳이지.”
“가겠습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안!” 수아가 다급하게 불렀다. “너무 위험해. 이건 너무나 무모한 계획이야!”
“무모하더라도,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야.” 이안은 수아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 기억은 사라졌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말하고 있어. 저 장치를 막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그리고… 어쩌면 저곳에 내 잃어버린 기억의 답이 있을지도 몰라.”
류 사령관은 이안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안의 능력이라면, 침투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 관리국은 이안의 존재를 이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정예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 거야.”
“상관없습니다.” 이안은 류 사령관에게 말했다. “내가 열쇠라면, 내가 멈춰야 합니다.”
작전실의 모든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존경과 동시에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 이안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출발 전, 이안은 작은 개인실로 돌아왔다. 수아가 조용히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 꼭 돌아와야 해.” 수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작은 금속 팬던트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이 기억을 잃기 전부터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단순한 펜던트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내가 기억을 잃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건가?” 이안이 물었다.
“응. 늘 너와 함께 있었어.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이것만큼은 놓지 않았지.” 수아는 팬던트를 이안의 목에 걸어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이안의 피부에 닿았다.
이안은 팬던트를 꽉 쥐었다. 그 작은 금속 조각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흐릿한 영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어린 소녀가 이 팬던트를 자신에게 건네는 모습… 아니, 자신이 소녀에게 건네는 모습일 수도 있었다.
“나, 돌아올 거야. 반드시.” 이안은 수아의 눈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은 수아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지만, 잃어버린 자신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안은 그런 수아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따뜻한 체온과 함께, 그녀의 불안감과 염려가 고스란히 이안에게 전해졌다.
그 품에서 벗어나자, 이안의 얼굴에는 다시금 결의가 서렸다.
그는 홀로그램 지도를 다시 한번 응시했다. ‘에테르움’ 유적지. 수백 년 전의 영광이 폐허로 변한 곳. 그곳의 심장부에는 인류의 시간마저 멈추려는 거대한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야망을 막을 유일한 열쇠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헤매는 이안 자신이었다.
이안은 깊은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그리고 왜 이 거대한 슬픔을 느껴야 하는지. 모든 답은 ‘에테르움’의 심장부에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곳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이안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