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그림자가 스튜디오를 감쌌다. 도시의 불빛은 창밖으로 아득하게 흩어져 있었고, 오직 테이블 램프의 은은한 불빛만이 낡은 콘솔과 헤드폰, 그리고 한 여인의 얼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유진,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의 DJ이자 지난 20년간 수많은 이들의 밤을 위로해 온 목소리의 주인. 그녀는 지친 듯 깊은 숨을 내쉬며 차가 식어버린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오프닝 시그널이 잔잔하게 흐르고, 빨간 불이 들어왔다.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피로가 가득했던 눈동자에 프로페셔널한 온화함이 깃들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밤하늘을 수놓은 작은 빛들처럼,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은하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밤을 지키는 목소리, 이유진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별이 떠 있나요? 잠시 그 별을 바라보며, 조용히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사연을 읽고, 수많은 노래를 틀어주며 타인의 희망과 절망을 함께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마치 멈춰버린 필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제는 그만 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찾아들기도 했다.
첫 번째 사연은 한 수험생의 것이었다.
“선생님, 오늘도 제 별은 독서실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다시 힘이 납니다. 합격하는 그날까지, 제 빛이 되어주세요.”
유진은 미소 지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어서 야간 근무 중인 경비원의 사연, 그리고 어린 자녀를 재우고 홀로 라디오를 듣는 워킹맘의 사연이 이어졌다. 작고 소박하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의 삶 속에 ‘별밤’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금 이곳에 붙잡아 두는 유일한 이유였다.
다음 곡을 재생하는 동안, 유진은 따뜻한 차 대신 차갑게 식어버린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별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밤, 작은 섬 마을에서 친구와 함께 낡은 라디오를 들으며 밤늦도록 깔깔대던 기억. 그때의 라디오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마법의 상자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라디오 부스는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외로운 밀실이 되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그 별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걸까.
노래가 끝나고, 유진은 다음 사연이 담긴 태블릿 화면을 바라봤다. 발신자는 ‘박선영’이라는 이름이었다. 이따금씩 정성스러운 장문의 메일을 보내오는 단골 청취자였다.
“유진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잊고 지냈던 오랜 추억 하나를 꺼내볼까 합니다.”
유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선영님의 사연은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 시작되었다.
“제가 어렸을 적 살던 곳은 바닷가 작은 마을이었어요. 지금은 개발되어 많이 변했지만, 그때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죠. 저에게는 ‘미라’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었죠. 저희는 늘 함께였고, 비밀도 많았어요. 특히 마을 어귀, 오래된 벚나무 아래에 저희만의 비밀 장소가 있었죠. 거기서 저희는 작은 보물 상자를 묻었어요. 언젠가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나 꺼내보자 약속하면서요. 상자 안에는 서로에게 쓴 편지와 반짝이는 조약돌, 그리고 작은 별자리 그림이 들어 있었죠. 그때 미라와 제가 가장 좋아했던 별자리는, 늘 서쪽 하늘에 외로이 빛나던 작은 별무리였어요.”
유진은 사연을 읽으며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벚나무 아래의 비밀 장소, 보물 상자, 그리고 특정 별자리.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찌릿했다. 이토록 익숙한 이야기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 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던 조각들을 건드리는 듯했다.
“그 아이와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미라네 가족이 도시로 이사 가면서 연락도 끊겼고, 저도 학업과 생활에 바빠지면서 그 시절을 잊고 살았죠. 그런데 요즘 밤하늘을 볼 때마다, 오래된 벚나무 아래에 묻었던 그 상자와 미라의 얼굴이 떠올라요.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아직도 그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만약 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제가 얼마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알려주고 싶네요. DJ님, 염치없지만 저희가 어릴 때 늘 불렀던 노래가 하나 있어요. ‘어릴 적 나의 작은 섬’이라는 옛날 자장가인데, 혹시 틀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노래를 들으면, 미라가 제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기대를 해봅니다.”
사연이 끝났다. 유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목구멍이 메이는 듯했다. ‘어릴 적 나의 작은 섬’. 그 노래. 그리고 그 별자리. 그리고 무엇보다… ‘미라’. 유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강렬한 예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박선영님의 소중한 사연 잘 들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가장 찬란한 별빛처럼 우리를 비추고 있을 때가 있죠. 그리고 그 빛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길을 다시 찾아내도록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오래된 LP판의 잡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고, 이내 나지막하고 정겨운 노랫말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유진은 눈을 감았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벚꽃 잎이 흩날리던 언덕, 낡은 양철 도시락에 담아 몰래 숨겨둔 보물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친구. 그 아이의 이름은… 미라였다. 어렴풋하게 사라졌던 어린 시절의 자신의 이름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 유진은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깊은 울림이 실려 있었다. 떨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네, ‘어릴 적 나의 작은 섬’ 들으셨습니다. 선영님의 마음이, 그리고 이 노래가, 그 그리운 미라님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때로는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진정으로 속했던 곳으로, 잊고 지냈던 인연에게로 다시 이끌어주기도 한다는 것을요. 어쩌면 그 별은 우리가 늘 바라보던 바로 그 별일지도 모릅니다.”
방송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유진은 평소처럼 마지막 인사를 건넸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라디오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자리의 의미를,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다시금 깨달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여러분의 길을 밝혀주기를 바라며,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이유진이었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시그널 음악이 흐르고, 빨간 불이 꺼졌다.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해졌다. 유진은 한참 동안 마이크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헤드폰을 벗었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는 낡고 빛바랜 금속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손때 묻은 상자를 꺼내 들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상자를 열자, 말린 꽃잎 몇 장과 빛바랜 편지들 사이로, 조악하게 그려진 벚나무 아래 비밀 장소 지도가 보였다. 그리고 지도 한구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이름이 있었다. ‘미라’.
유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녀는 마침내 그 별을 찾은 것 같았다. 그녀의 진짜 이름, 미라.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라디오를 통해 다시 이어진 인연의 끈. 그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이 밤하늘 아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별을 찾아 나설 시간이었다.
— 제672화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