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낡은 스케치 한 장에 의지해 낯선 고요함이 흐르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수십 년 전, 서연이 언젠가 꼭 작은 공방을 열고 싶다고 속삭였던 바로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과 풀내음이 어쩐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그는 거의 헐어버린 지도를 손에 쥐고 서연의 꿈이 시작될지도 모를 그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작고 아담한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듯한 아담한 상점이었다. ‘늘봄 아뜰리에’. 간판 아래에 걸린 작은 그림은 서연이 어릴 적 그렸던 꽃 그림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온몸에 울렸다. 마침내, 마침내 찾은 것일까? 이토록 오랜 시간 헤매고 헤매었던 길의 끝에 서연이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나무 문고리를 잡았다. 옅은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온갖 꽃들이 내뿜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물결처럼 밀려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놓인 화분들, 벽에 걸린 마른 꽃다발들이 마치 살아있는 그림 같았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분명 서연의 취향이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게 안쪽으로 향했다.
카운터 뒤편에서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나긋한 뒷모습,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지훈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연아…?”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훈의 기대와는 다른, 앳된 얼굴이었다.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맑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지만, 지훈은 겨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 어서 오세요.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오늘은 제가 당번이라서요.” 여인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지훈의 심장에 박힌 칼날을 더 깊이 쑤시는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사장님이 서연 씨가 맞으신가요?”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여인의 눈이 순간 커졌다. “서연 언니요? 네, 맞아요. 여기가 언니 공방이에요. 혹시 언니 지인이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지인입니다. 서연 씨는… 지금 안 계신가요?”
여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꽃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 언니는요… 몇 달 전에 갑자기 떠났어요. 저한테 가게를 맡기고 홀연히 사라지셨어요.”
지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또다시, 또다시 놓친 것인가. 이토록 가까이 왔는데도. “떠났다고요? 어디로요? 왜요?”
여인은 카운터 위로 놓인 작은 메모지를 손으로 매만졌다.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그냥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고만 말씀하시고요. 언니는 떠나기 전부터 좀 힘들어 보였어요. 며칠 밤낮으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가끔 이상한 편지나 전화를 받는 것 같았어요. 표정이 늘 어두웠죠.”
이상한 편지? 전화? 지훈의 촉이 발동했다. 단순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서연은 위험에 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언니가 저한테 남긴 말은 없었나요? 아니면 혹시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만한 단서라도요?” 지훈은 간절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말린 꽃잎들과 작은 유리병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봉투 하나를 찾아 지훈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언니가 가게를 떠나기 며칠 전, 제게 이걸 주면서 ‘혹시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오면 전해달라’고 했어요.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렸던 사람이라면 알아볼 것’이라고요. 저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혹시 아저씨가 그 남자분인가요?”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보관된 봉투 위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봉투를 감싸고 있는 종이의 질감,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 향기. 분명 서연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었다. 그는 봉투를 움켜쥐었다. 이제야 겨우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은데, 서연은 또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가 남긴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또 다른 희망일까, 아니면 더 깊은 미궁으로의 초대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