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674화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낡은 나뭇가지들을 흔드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은은 손때 묻은 할머니의 일기장을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채, 돋보기 너머로 바랜 글씨를 좇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 작은 노트는 지은에게 할머니의 숨겨진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었다. 674화에 이르기까지, 지은은 수많은 할머니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잊힌 이름들을 마주했다.

오늘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1953년 7월 28일의 일기였다. 그 페이지는 다른 어느 페이지보다도 여백이 많았고, 글씨는 왠지 모르게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날짜는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할머니의 스무 살 여름이 기록된 날이었다. 지은은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 여름, 강변에 앉아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수심에 잠겼던 나.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모든 것이 두려웠어.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다시 꿈을 꾸었지. 내 작은 방,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나는 다시 가야금을 잡았어. 손가락 끝으로 현을 튕길 때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지. ‘춘앵전’의 선율이 내 안에서 피어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어. 전쟁도, 가난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그 순간만큼은 사라졌어. 오직 나 자신과, 이 여섯 줄의 현만이 존재했지.’

지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야금? 할머니가? 그녀는 한 번도 할머니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늘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만들고, 밭에서 채소를 가꾸며, 낡은 재봉틀 앞에서 가족들의 옷을 꿰매는 분이셨다. 손은 늘 거칠었고, 늘 무언가를 쥐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할머니의 손이 섬세한 가야금 현을 튕겼을 리가… 지은은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은 늘 내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셨지. ‘명창의 목소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고, 명인의 손끝은 영혼이 빚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씀이 너무 좋아서, 밤낮으로 가야금만 붙들고 살았어. 내 꿈은, 단 하나의 꿈은, 언젠가 한복을 곱게 입고 무대에 올라 내 가야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어. 비단 같은 소리, 새벽 공기 같은 청아한 소리, 때로는 거친 파도 같은 격정적인 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될 줄 알았지.’

글자 사이에서 할머니의 뜨거운 열정이 지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지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지금껏 할머니를 단순한 ‘할머니’로만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따뜻하지만 평범한 할머니. 하지만 일기장은 그녀에게 할머니가 얼마나 크고 깊은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여성이었는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 초롱불을 든 아버지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 쌀 한 톨 없는 집, 병든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 나는 가야금을 덮어야 했어. 내 손은 이제 밭을 일구고, 빨래를 하고, 동생들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어. 선생님의 말씀, 내 꿈, 모두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래알 같았지.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어. ‘숙아, 너는 우리 집의 기둥이다. 네가 흔들리면 온 집안이 무너진다.’ 나는 알았어. 이제 내가 꾸었던 그 꿈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춘앵전’을 연주했어. 눈물로 현이 젖는 것도 모르고, 손가락이 피멍이 드는 것도 모르고.’

지은의 눈가에도 뜨거운 물기가 맺혔다. 할머니의 굳건한 삶 이면에 이토록 시리고 아픈 포기가 숨겨져 있었다니.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대, 그리고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 시절, 할머니는 자신의 가장 찬란한 꿈을 기꺼이 희생했다.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희생 위에 지금의 자신과 가족들이 서 있음을 깨닫자, 지은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먹먹함을 느꼈다.

‘이제 나의 가야금은 소리 없는 나무 조각일 뿐이야. 내 손가락은 다시는 그 영롱한 소리를 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라는 단어는 희미한 잉크로 여러 번 덧써져 있었다. 마치 할머니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강박적으로. 그 뒤로는 더 이상 가야금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날의 일기는 할머니가 평생을 짊어진 무거운 짐이자, 동시에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의 증거였다. 지은은 일기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억센 손으로 김치를 버무리고, 투박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늘 강인하고 긍정적인 분이셨지만, 이따금씩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지은은 그때마다 그저 ‘할머니가 피곤하신가 보다’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 한숨 속에는 가슴 깊이 묻어둔,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숨어 있었음을.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다락방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함부로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낡은 나무 상자가 떠올랐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자, 꿉꿉한 나무 냄새와 함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안에는 바래고 해어진 한복 저고리, 빛바랜 사진첩, 그리고… 낡은 천에 싸인 길쭉한 물건이 있었다.

지은은 천을 걷어냈다. 거기에는 녹색 비단으로 장식된, 작지만 아름다운 가야금이 잠들어 있었다. 현은 끊어져 있었고, 나무는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있었지만, 여전히 품위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은은 조심스럽게 가야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끊어진 현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얹었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에서 할머니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지은아, 사람은 말이야, 꼭 꿈을 꾸어야 해.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야 해. 설령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진짜 용기란다.” 그 말씀 속에는 평생 꿈을 놓지 않았던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연주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꿈은 결코 죽지 않고, 할머니의 영혼 속에서 늘 살아 숨 쉬고 있었으리라.

지은은 가야금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가야금을 다시 연주될 수 있도록 고치겠노라고. 할머니의 꺾인 꿈이 자신에게로 이어진 것처럼, 그녀의 손에서 다시 ‘춘앵전’의 선율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그것은 단순한 악기 수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잊힌 영혼을 위로하고, 그녀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하는, 지은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고요한 밤, 지은의 눈물은 끊어진 가야금 현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이제 새로운 페이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할머니의 오래된 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