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659화

차가운 눈꽃, 뜨거운 맹세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밤새 퍼붓던 눈은 마치 모든 소음을 흡수하기라도 한 듯 도시를 고요하고 신비로운 풍경으로 탈바꿈시켰다. 병실 안은 그 고요함 속에서도 불안한 공기가 맴돌았다. 이준호는 침대 곁 의자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눈꽃은 차갑고 아름다웠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얼어붙을 듯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김소라는 옅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정적을 깨고 희미하게 퍼져 나갔다. 며칠 전부터 급격히 나빠진 그녀의 상태는 이준호의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날, 겨울 눈꽃이 처음 내리던 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했던 그들의 약속이 다시금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준호는 소라의 앙상해진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지난 수많은 겨울을 떠올렸다. 함께 웃고, 울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던 날들. 그때마다 그들의 약속은 더욱 단단해졌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달랐다. 이전의 어떤 시련보다도 가혹하고 냉정한 겨울이었다.

깊어지는 그림자

“선생님… 소라 상태는 어떤가요?”

아침 회진 시간, 준호는 초조한 얼굴로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 의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차트를 들여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현재로서는 약물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염증 수치가 계속 오르고 있고… 몸이 너무 약해져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입니다.”

의사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준호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전문가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현실은 더욱 잔혹하게 다가왔다. 어제 밤새 준호는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를 찾아 헤맸다. 비슷한 사례, 새로운 치료법… 하지만 대부분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내용뿐이었다.

“그럼…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준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의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새로운 임상 시험 단계의 치료법인데… 성공률이 극히 낮고 부작용도 심각할 수 있습니다. 환자분이 워낙 쇠약해져 있어서 오히려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고요.”

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률이 낮고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말은 곧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소라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가 나가고, 병실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준호는 잠든 소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앙상한 볼, 창백한 입술,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소라가 눈을 감고 있어도 준호는 그 속에서 옛날의 밝고 강인했던 그녀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안 돼… 소라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그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잊을 수 없는 약속

문득 그의 뇌리에 아득한 기억 하나가 스쳤다. 열여덟 살의 소라와 준호. 세상을 다 가진 듯 푸르고 눈부시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이었다. 작은 언덕 위에 서서 그들은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소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호야, 나는 말이야… 아주 아주 오래오래 살 거야. 그리고 너랑 같이 세상의 모든 겨울을 다 보고 싶어.”

“어리광 부리지 마, 김소라.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옆에 있는데 누가 널 데려가겠어?”

“진짜지?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아픔이 와도… 우리 절대 서로 놓지 않기로 약속하는 거야. 이 하얀 눈꽃처럼 깨끗하고 변치 않는 약속.”

소라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준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가락을 걸었다. 하얀 눈꽃이 그들의 약속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고, 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맹세가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기둥이자, 어떤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 기억이 준호의 굳게 닫힌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그래, 포기할 수 없어. 소라가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때, 소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 흐릿한 눈동자가 준호의 얼굴을 찾아 헤매다 이내 초점을 맞추었다.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준호…야…?”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 같았다.

“응, 소라. 나 여기 있어.” 준호는 소라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또… 눈이 와…?” 소라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아련하고 깊어 보였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응, 예뻐.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준호는 애써 미소 지었다.

선택의 기로

“준호야…” 소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녀의 말에 준호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준호를 먼저 생각했다. 자신의 고통보다 준호의 슬픔을 더 염려했다. 그 강인함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아니, 안 괜찮아. 소라, 나 할 말이 있어.” 준호는 심호흡을 했다. “의사 선생님이… 새로운 치료법이 있대. 성공률은 낮지만… 그래도 시도해볼 수 있대.”

소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준호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수많은 고통과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가져올 더 큰 고통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준호야… 나 괜찮아… 이제… 충분히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준호의 마음을 녹여내리는 듯한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사람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렸다.

“안 돼, 소라! 그런 말 하지 마! 우리가 약속했잖아! 어떤 겨울도 함께 이겨내기로 했잖아! 이제 겨우 659번째 겨울일 뿐이야. 우리는 더 많은 겨울을 함께 봐야 해!” 준호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식어버린 그의 손을 타고 소라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소라는 아무 말 없이 준호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힘없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준호를 향한 깊고도 변치 않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준호야… 너무 아파… 이젠… 이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어…” 소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아픔이 고스란히 준호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아니야, 소라. 내가 있잖아. 내가 너와 함께 모든 고통을 견뎌낼게. 너 혼자 아프게 두지 않을 거야. 제발… 제발 포기하지 마…”

준호는 소라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그는 소라를 잃을 수 없었다. 그들의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전부였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그들이 함께 맹세했던 그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병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렸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고통이 뒤섞인 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준호의 간절한 외침은 차가운 병실 공기를 뚫고 소라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겨울은 과연 약속대로 계속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