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회색빛 석조 벽과 천장을 메운 기묘한 문양들은 이곳이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린, 아득한 고대의 유적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시우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벽에 기대섰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두통은 단순히 신체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잊힌 기억의 파편들이 의식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르려는 격렬한 충돌 같았다.
윤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빛은 걱정과 지친 애정으로 가득했다. 수백 번의 시간 이동, 수많은 세계를 헤매며 잃어버린 시우의 기억을 찾아 헤맨 길고 고된 여정은 그녀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젊은 여행자가 아니었다. 시간의 무게와 상실의 그림자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또 그 꿈인가요, 시우 씨?” 윤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라기보다는… 환영에 가까워. 희미한 잔상들이 겹치고 흩어지면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찾아야 한다’고.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심장 부근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잃어버린 시간 여행 장치의 핵심 부품, ‘시간의 조각’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의 기억을 되돌려주지는 못했다.
그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망각의 전당’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시간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곳으로,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신비로운 장소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곳은 거대한 폐허였고, 복잡한 시간 통로의 잔해만이 남아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었다.
윤아는 그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너무 애쓰지 마세요. 기억은… 언젠가 제자리를 찾을 거예요.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더 멀어질 뿐이에요.”
시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그럴까, 윤아? 664번째의 아침이야.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왜 이 모든 일을 시작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우리가 헤쳐온 수많은 위험들,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야. 내 안에는 텅 빈 공간만 있을 뿐.”
그의 말은 윤아의 가슴을 쥐어짰다. 그녀는 시우가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 그들의 임무는 분명했고, 희망은 명확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항해는 나침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과 같았다. 오직 시우의 막연한 예감과 그녀의 헌신만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당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석판에서 미약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석판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자들이 섬광처럼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빛은 점차 강해지더니, 전당의 어둠을 가르고 일렁이는 푸른색 에너지 기둥을 형성했다. 윙윙거리는 소음이 귓가를 때렸고,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것은…!” 윤아가 숨을 삼켰다.
시우의 눈은 빛나는 석판에 고정되었다. 그의 두통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동시에 잊고 있었던 어떤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이끌리는 듯한 강렬한 충동이 그를 지배했다. 그의 안에서, 잠들어 있던 시간 여행자의 본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석판의 중앙에서 형성된 에너지 기둥은 마치 시간의 문을 연 것처럼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그 안에서 아득한 과거의 풍경과 미지의 미래가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왜곡된 이미지들 속에서, 시우는 아주 짧은 순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절박함과 동시에 어떤 단단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 나였어?’
그는 홀린 듯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에너지 기둥으로 다가갔다. 윤아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시우 씨! 위험해요!”
그러나 시우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에너지 기둥 속에서 사라져가는 환영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환영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주 작고 희미한 빛. 그 빛은 시우의 기억 속에 갇힌 어떤 열쇠를 가리키는 듯했다.
“저 빛… 저곳에…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있어.” 시우의 목소리는 메아리쳤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시간 찾아 헤맨 희미한 희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에너지 기둥은 갑자기 격렬하게 폭발하며 사라졌다. 석판은 다시 잠잠해졌고, 전당은 이전보다 더 깊은 침묵에 잠겼다. 남은 것은 싸늘한 공기와, 시우의 가슴속에 새겨진 선명한 한 조각의 환영뿐이었다.
시우는 무릎을 꿇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저 에너지 기둥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환영에 담겨 있다는 것을. 그의 기억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잠시 닫혀 있을 뿐인 문이라는 것을.
윤아는 그의 옆에 앉아 묵묵히 어깨를 감쌌다. “우리가 찾아 줄 거예요, 시우 씨. 당신의 모든 기억을. 함께.”
시우는 고개를 들어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혼란과 고통이 서려 있었지만, 그 깊은 눈빛 속에는 오랜 시간 방황하던 자가 드디어 방향을 찾은 듯한 미약하지만 강렬한 결의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윤아. 이제 알아.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단순한 과거의 파편이 아니야. 그것은… 내가 왜 이 긴 시간을 여행했는지에 대한 이유. 그리고 내가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 거야.”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안개처럼 자욱한 미지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망각의 전당에서 목격한 한 조각의 환영은, 664화에 걸친 긴 여정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이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 망각의 심장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우는 다시 일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미약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기억의 문이 조금 열렸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그의 진정한 숙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