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89화

고요한 밤, 서연의 작은 아파트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살아있는 숨결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창밖은 검푸른 어둠에 잠겨 있었고, 도시의 불빛 너머로 별들이 숨죽여 빛나고 있을 터였다. 침대맡 스탠드의 따스한 불빛 아래, 서연의 손에는 낡은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봉투는 빛이 바랬고, 모서리는 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기억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고 아팠다.

DJ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라고 하죠. 하지만 때로는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우리를 과거의 그림자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밤, 한 청취자 분께서 보내주신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서연은 봉투를 든 채 숨을 죽였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오래된 상처가 다시 입을 벌리는 듯했다. DJ가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별밤지기님. 저는 20년 전,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너무나도 어리고 서툴렀던 우리였기에, 그 사랑은 별똥별처럼 짧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사라졌죠. 저는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가끔 그를 찾아 헤맵니다. 혹시 그도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요? 그도 저처럼, 그 밤의 별들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저는 아직… 그때의 우리를 놓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도, 그에게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DJ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가끔은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20년이란 시간 동안 품어왔던 마음, 충분히 아팠을 겁니다. 이제 그 별을 보내주고, 새로운 별을 맞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다음 곡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입니다. 모두에게 깊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20년. 정말 얄궂은 숫자였다. 그녀 역시 20년 전, 똑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는 그가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부디 아파하지 말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빛나는 별이 되어주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서연은 그 별을 따라가는 대신,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별은 그녀에게 나아갈 용기가 아닌, 끝없는 그리움을 남겼을 뿐이었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구슬픈 기타 선율과 김광석의 목소리가 서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노랫말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서연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 깨달았다. 놓아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놓아진 채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서연은 편지 봉투를 꽉 쥐었다. 더 이상 이 편지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와의 추억은 아름다운 별이 맞았다. 하지만 그 별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기에, 그녀는 정작 자신의 밤하늘을 밝힐 새로운 별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별을 다시 밤하늘로 돌려보낼 때였다. 그 별이 자신의 자리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노래가 끝나고, DJ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밤은 깊어가지만,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내일도, 분명히 빛날 겁니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도시의 불빛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별 하나가 그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별이 과거의 잔상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그녀를 기다리는 미래의 빛이었다. 서연은 천천히, 하지만 단단하게 봉투를 열었다. 그녀의 손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작은 용기의 반짝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