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시간의 멜로디
스튜디오의 아늑한 불빛은 밤의 장막을 뚫고 쏟아지는 별빛처럼 나지막이 빛나고 있었다. 낡았지만 길들여진 마이크 앞, 지훈은 익숙하게 헤드폰을 고쳐 쓰고 미소 지었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이 밤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힌 검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득한 우주를 수놓은 보석들을 쏟아부은 것처럼.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672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깊어가는 밤,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별이 떠오르고 있나요?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맑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별이 되어 반짝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스하고 나른했다. 그의 낮은 음성은 공기 중으로 스며들어 청취자들의 귓가에 조용히 가닿았다. 그의 손은 익숙하게 사연이 담긴 카드들을 넘겼다. 수많은 글씨체들, 수많은 사연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유독 한 통의 편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성껏 눌러 쓴 듯한, 조금은 떨리는 듯한 글씨. 보내는 이: 서하.
잃어버린 별을 찾아서
“오늘 첫 사연은 서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제목은 ‘잃어버린 별을 찾아서’입니다.”
지훈은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DJ 지훈님,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중반의 서하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펜을 들고 이렇게 글을 쓰려니 손끝이 다 떨리네요. 이 방송을 듣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렇게 직접 사연을 보내는 건 처음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에서 가장 빛났던 별이자, 동시에 가장 멀리 사라져버린 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 친구, 아니 어쩌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 은수에게 말이죠. 저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어요. 저는 늘 조용하고 소심한 아이였고, 은수는 늘 밝고 반짝이는 아이였습니다.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과 같았죠. 언제나 그 자리에 빛나고 있었어요.
저희 둘은 방과 후 학교 옥상에 자주 올라가곤 했어요. 낡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저희만의 비밀 의식이었죠. 은수는 언제나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은수의 눈동자 속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특히 여름밤, 은하수가 유난히 선명했던 그날 밤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은수는 제게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서하야, 저기 저 은하수 보이지? 저기 어딘가에 분명 우리만의 별이 있을 거야. 나중에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저 별을 보면 서로를 기억하는 거야.”
그 약속은 흐릿한 펜으로 쓴 것처럼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습니다. 졸업 후, 저희는 각자의 길을 걸었고, 연락은 점차 뜸해졌죠.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은수에 대한 서운함으로, 결국 우리의 연결고리를 놓아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은수를 본 건 대학 1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색한 미소만 주고받고 헤어졌죠. 그 후로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저는 은수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은수는 저의 손에서 더 멀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밤하늘에 별이 사라지듯, 흔적도 없이 말이죠.
최근, 저는 우연히 예전 옥상에서 은수가 기타를 치며 불러주었던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그 여름밤의 은하수, 은수의 목소리, 그리고 그때의 제 감정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얼마나 은수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시절의 제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깨달았죠.
부디, DJ 지훈님. 오늘 이 밤, 저와 은수를 위한 그 노래를 들려주세요. 혹시라도 은수가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제가 이토록 은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혹시, 혹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처럼 함께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싶어요. 우리만의 별을 다시 찾아서요. 노래는 ‘길 잃은 별’이라는 곡입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디 밴드의 노래라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깊어가는 밤, 서하 드림.
편지를 읽는 내내 지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길 잃은 별’. 그 노래는 지훈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래전,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 낡은 옥상에 앉아 별을 세던 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의 끝에는 늘 그 노래가 흘렀다. 그 별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 사람.
지훈은 애써 감정을 다스리며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서하님, 정말… 가슴 시린 사연입니다. 잃어버린 별을 찾는다는 그 마음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 그 별이 다시 제자리에서 빛을 발할 거라고 믿습니다. ‘길 잃은 별’… 네, 저도 이 노래를 기억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아실 거예요. 서하님과 은수님을 위한 노래, 그리고 이 밤, 각자의 별을 그리워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지훈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튜디오 안으로 잔잔하고 아련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왔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와 보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서하의 사연과 자신의 오래된 기억이 한데 얽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여름밤의 은하수, 그리고 ‘그녀’의 따스했던 미소. 그녀도 지금 이 밤, 이 별을 보고 있을까. 이 노래를 듣고 있을까.
밤하늘의 뜻밖의 조우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스튜디오 전화가 울렸다. 예상치 못한 순간의 전화벨 소리에 지훈은 살짝 놀랐다. 그는 보통 사연 소개 후, 다음 곡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곤 했다.
“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입니다. 지금… 전화 연결이 되었습니다. 청취자 분이신가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얕은 숨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DJ 지훈님… 안녕하세요. 저는… 현우라고 합니다. 방금 들려주신 서하님의 사연을 듣고…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도저히 전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우라는 이름의 청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서하님께서 찾으시는… 은수라는 분… 그 은수가 제게는… 하나뿐인 동생입니다. 제가… 제가 아는 은수가 맞다면… 그 은수는 지금… 꽤 오랫동안… 투병 중입니다. 서하님의 편지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은수는… 은수는 아직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수는… 얼마 전부터 이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매일 밤 듣고 있습니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럴 수가. 672화 동안 이런 기막힌 우연은 처음이었다. 그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현우에게 물었다.
“현우님, 혹시… 은수님께 직접 서하님의 마음을 전할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서하님도 분명 이 방송을 듣고 계실 겁니다.”
현우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네… 지금 은수 옆에 제가 있습니다. 은수가 방금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서하에게 전해줘… 나도 너를 기억한다고… 그리고 옥상에서 함께 보았던 그 별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가장 밝게 빛나고 있다고…’”
지훈의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그는 마이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라디오는 그저 소리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었다. 이 별빛 아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은하수였다.
“은수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하님께도 분명히 전달될 겁니다. 현우님, 그리고 은수님.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DJ 지훈님… 은수가… 어쩌면 지훈님도… 오래 전 만났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옥상에서… 함께 별을 보았던… 기타를 치던… 오빠라고…”
그 말은 스튜디오의 모든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훈의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잊고 지냈던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흩어진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여름밤, 옥상, 기타, 그리고 두 소녀. 한 명은 서하와 같은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흔들렸다.
“네… 현우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훈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마지막 멘트를 내뱉고, 다음 곡으로 넘기는 대신 서둘러 방송을 마쳤다. 라디오는 옅은 배경 음악만을 남긴 채, 길고도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별들은 여전히 창밖에서 쉼 없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에게 그 별들은 더 이상 멀고 아득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은수. 그리고 그 옥상. 그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별이, 672번째 밤에 기적처럼 다시 나타난 것일까.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67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