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97화

돌아온 파편, 엇갈린 운명

차디찬 시간의 강물 속에서, 시우는 표류하고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시우의 정신을 할퀴었고, 그 모든 상처의 한가운데에는 잊고 싶었던 이름, 유진이 있었다. 낡은 창고,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먼지와 거미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시우의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을 비추고 있었다. 사진 속 유진은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시우의 기억 속에 언제나 슬픔으로 물들어 있던 그 미소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행복.

“유진…” 시우의 목소리는 닿을 곳 없는 메아리처럼 창고 안을 맴돌았다. 방금 전 떠올린 기억은 잔인했다. 과거, 시우는 시간의 균열을 막기 위해 유진의 존재를, 유진과의 모든 추억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그것은 시간 여행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의무였다. 특정 인물이 특정 시간대에 존재함으로써 발생할 ‘시간 왜곡’을 막기 위해, 그 인물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만 했다. 그 인물이 설령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더라도.

하지만 시우가 기억을 잃고 헤매는 동안, 그 ‘삭제된 존재’인 유진은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현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 시우는 다시 유진을 만나야만 했다. 이번에는 제거해야 할 위험 요소로서가 아니라, 함께 깨어진 시간을 되돌릴 유일한 열쇠로서.

철컥,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짙은 코트를 입은 그는 시우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가운 눈빛,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슬픔이 깃든 얼굴. “결국, 기억해냈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그녀가 당신의 과거를 깨우고, 당신의 현재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시우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제온… 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로군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제온은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찾아 헤맨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당신은 기억을 잃은 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당신은 본래의 운명으로 돌아왔지. 그리고 그 운명은… 파멸뿐입니다.”

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고장 나 있던 시계추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듯, 몸 안의 모든 시간 에너지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유진을 지켜야 한다는 기억, 유진 때문에 자신을 지워야 했던 기억. 두 개의 모순된 진실이 시우의 심장을 찢어놓고 있었다.

“파멸이든 아니든, 이제 유진은 저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을 겁니다.” 시우의 눈빛은 결연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뒤섞인 채, 새로운 결심이 그 안에 뿌리내렸다. “당신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든, 제온. 저는 그녀를 지킬 겁니다. 이번에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제온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동정심일까, 아니면 체념일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창고 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시간의 왜곡으로 인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진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너무 늦었을 겁니다, 시우. 당신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고, 결국 그녀는 당신의 손에… 다시 사라지게 될 테니까.” 제온의 마지막 말은 시우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시우는 그 말이 그저 경고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것은 비극의 예언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의 한가운데, 유진이 있었다.

시우는 창고를 나섰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시간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유진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우는 이제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잃어버렸던 모든 시간의 조각들을 모아, 시우는 이제 운명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진을 향한, 아프고도 찬란한 그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