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창가, 지쳐도 좋은 풍경
낡은 승합차는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창밖으로는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로 부서지는 햇살은 맹렬한 여름을 그대로 증명하는 듯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차 안을 감쌌지만, 서연이의 얼굴에는 불평이 가득했다. 열여섯, 세상의 모든 것이 지루하고 의미 없어 보일 나이. 특히나 인터넷 신호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이 외딴 어촌 마을은 그녀에게 최악의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엄마, 진짜 와이파이 안 돼요? 나 지금 스냅챗 스토리 올려야 하는데!”
뒷좌석에서 서연이가 휴대폰을 흔들며 짜증을 냈다. 옆에 앉은 초등학교 4학년 지훈이는 누나의 휴대폰 중독증에 익숙한 듯 관심도 없었다. 지훈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갈매기 떼를 따라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휴, 서연아. 여기는 도시가 아니잖아. 자연을 즐기러 온 거지, 휴대폰 하러 온 거 아니야.”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빠는 이런 ‘아날로그’ 여행을 늘 고집했다. 디지털의 편리함 대신, 불편함 속에서 찾아내는 진짜 추억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맨날 그런 소리만 해! 자연? 내가 풀떼기 보러 여기까지 왔어요?”
“풀떼기? 야, 여기 바다 봐봐. 얼마나 예뻐? 이런 바다 서울에서 봤어?”
엄마가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려 서연이를 달랬지만, 서연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시 휴대폰 화면 속 가상세계로 침잠했다. 지훈이는 그런 누나를 흘깃 보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한참을 달려 차는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한옥 게스트하우스 앞에 멈춰 섰다. 삐걱이는 나무 대문과 마당에 심어진 소박한 꽃들이 정겨웠지만, 서연이의 눈에는 그저 낡고 불편한 공간으로만 보였다.
“와, 아빠! 진짜 한옥이다! 마루도 있고!”
지훈이가 신이 나서 차에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아빠와 엄마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렸다.
“자, 어때? 바람이 시원하지? 여기서 오늘 밤을 보낼 거야.”
아빠가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서연이는 툴툴거리며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서비스 없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외로운 길목, 사라진 신호
낡은 게스트하우스의 방문을 열자 나무 냄새와 오래된 흙벽의 향기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방 안에는 텔레비전도, 에어컨도 없었다. 오직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솔숲이 전부였다. 서연이는 짐을 던지듯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아빠, 진짜 여기서 뭐 하고 놀아요? 심심해 죽겠어.”
“심심할 틈이 어딨어! 저녁 먹고 우리 근처 산책 갈 거야. 여기 ‘고래바위’라는 데가 있는데, 해 질 녘에 보면 진짜 고래 같대.”
아빠는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고, 지훈이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의 강아지와 신이 나서 놀고 있었다.
억지로 저녁을 먹고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산책길에 올랐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며 바다는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좁은 오솔길은 숲과 바다 사이를 굽이굽이 이어졌다.
“누나, 빨리 와!”
지훈이가 앞장서서 달렸다. 서연이는 뒤처져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신호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휴대폰 그만 보고 풍경 좀 봐, 서연아.”
엄마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서연이는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만 붙들고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들이 올린 사진들을 보면서 괜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고, 답답함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곳에서 홀로 고립된 것만 같았다.
숲길은 점점 더 깊어졌다. 아빠가 알려준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 여기 길이 좀 이상한데요?”
엄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빠는 지도를 한번 확인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어? 뭔가 좀 이상한데? 아까 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나?”
“아빠는 길치면서 맨날 자기가 길 잘 안다고!”
서연이가 툴툴거렸다. 그때였다.
“악!”
앞서가던 지훈이의 외마디 비명. 돌부리에 걸렸는지 지훈이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무릎팍이 까져 벌겋게 피가 배어 나왔다.
“지훈아! 괜찮아?”
엄마가 놀라서 달려갔다. 지훈이는 아프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서연이는 잠시 멍하니 지훈이를 바라봤다. 휴대폰을 손에 든 채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은 가족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지훈이를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서연이의 가슴 한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다는 충동.
붉은 노을 아래, 피어나는 위로
엄마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지훈이의 상처를 눌렀다. 아빠는 지훈이를 안아 올리려 애썼지만, 지훈이는 서러움에 차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제야 서연이는 정신을 차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가갔다.
“지훈아, 괜찮아? 봐봐, 누나가 호 해줄게.”
서연이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지훈이의 상처를 불어주었다. 지훈이는 여전히 훌쩍였지만, 누나의 따뜻한 손길에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서연이는 가방에서 상비약을 뒤적였다. 운 좋게도 작은 밴드가 나왔다. 조심스럽게 상처에 붙여주었다.
“아휴, 우리 서연이 다 컸네. 고마워, 딸.”
엄마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서연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빠도 멋쩍게 웃으며 서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아프지? 아프면 아빠가 더 힘내서 멋진 바위 보여줄게. 가자, 고래바위.”
아빠는 지훈이의 손을 잡고 다시 앞장섰다. 서연이는 지훈이의 다른 손을 잡았다. 아까 전과는 달리 묵직하게 잡히는 지훈이의 작은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록 길을 헤맸지만, 넘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에게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길이 끝나고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와….”
서연이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다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암석은 마치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고래 같았다. 붉은 노을이 그 고래바위를 온통 물들이고 있었고, 파도는 황홀한 빛깔의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지훈이도 울음을 뚝 그치고 넋을 잃은 듯 고래바위를 바라봤다. 아빠와 엄마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말없이 풍경을 감상했다. 그 어떤 휴대폰 화면에서도, 그 어떤 필터로도 담아낼 수 없는 진짜 아름다움이었다.
서연이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순간의 감동을, 가족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서연이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노을을 배경으로 서로 어깨동무를 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지훈이의 모습을 찍었다. 이번엔 자신의 셀카가 아니라, 가족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이 풍경은 오직 눈으로만, 마음으로만 담아야 온전히 느껴질 것 같았다.
어둠 속의 불빛, 함께 하는 온기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은 훨씬 가벼웠다. 지훈이는 아까의 아픔을 잊은 듯 종알종알 고래바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연이도 간간히 대꾸하며 함께 웃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깔리자, 게스트하우스 마당에는 작은 조명들이 따뜻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내어주신 뜨끈한 해물칼국수와 바비큐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 길도 잃고, 지훈이도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네.”
아빠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서연이가 지훈이도 돌봐주고, 우리 딸 다 컸어.”
엄마가 서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연이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고래바위는 진짜 멋있었어요. 아빠.”
서연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너 휴대폰만 보느라 못 볼까 봐 아빠는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흥, 제가 그렇게 못 말리는 줄 알았나 봐요?”
서연이가 살짝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 속에는 진심으로 아빠의 마음에 공감하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서연이는 이불 속에 몸을 묻고 휴대폰 대신 바깥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였다. 디지털의 신호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지만, 대신 온몸으로 자연의 소리와 가족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내일은 또 어떤 시끌벅적한 일이 벌어질까.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불안하거나 심심하지 않았다. 이제는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이 불편하고도 따뜻한 가족 여행이, 어쩌면 휴대폰 속 세상보다 훨씬 더 값진 무언가를 자신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서연이는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