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672화

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하늘을 가르며 날카롭게 울었다. 창밖으로는 쉼 없이 펄펄 눈꽃이 흩날렸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온통 하얀 수의를 입은 듯 고요했고, 그 속에서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이지호는 창가에 기대어 하얀 입김을 내쉬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손안에서 식어가는 온기만큼, 그의 마음속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차갑게 번지고 있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면, 십수 년 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과 소녀가 엉성하게 깎인 나뭇가지에 손수건을 묶으며, 굳게 다짐했던 맹세. 그때의 눈송이도 이토록 크고 아름다웠던가. 지호는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지켜내지 못한 약속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지호 도련님, 여기 군고구마 드세요. 따뜻할 때 드셔야 맛있어요.”

어느새 옆에 다가온 김 노인이 온기를 품은 봉투를 건넸다. 김 노인은 평생을 이 집에서 지내며 지호의 유모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는 연륜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지호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군고구마 봉투를 받아 들었지만, 쉽사리 입에 대지는 못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싸늘했다. 김 노인은 지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창밖의 눈을 응시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녀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애가 또 왔습니다.”

김 노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지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애’가 누구를 뜻하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이 집을 찾아왔지만, 매번 돌려보냈던 서연우였다. 어떠한 말도, 어떠한 해명도 그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도련님,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건가요? 연우 아가씨는 도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련님을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걱정? 제가 왜 그녀의 걱정을 받아야 합니까. 제가 한 일은…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뿐인데.”

지호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는 차가운 눈발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녀가 증오할 만한 존재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래야만 그녀가 죄책감 없이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어설픈 계산은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에요, 도련님. 연우 아가씨는 전부 알고 있었어요. 도련님께서 아파서… 병원에 계실 때도 몰래 찾아와 도련님을 지켜봤습니다. 그 지독한 치료를 견뎌내면서도, 혹시라도 아가씨에게 짐이 될까, 아무것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다는 것을요.”

김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호의 심장을 꿰뚫는 비수와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감춰두었던 그의 가장 깊은 상처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세상은 온통 산산조각 나는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 애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지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선 혼란과 절망이 뒤섞여 일렁였다. 그는 연우에게는 완벽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녀의 꿈을 짓밟고, 행복을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남는 것을 택했다. 오직 그녀가 스스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그 모든 비난을 혼자 감당하기로 결심했었다.

“아가씨가 병원에 찾아왔을 때… 제가 그만 그만두지 못하고 전부 이야기해 버렸습니다. 도련님께서 얼마나 아가씨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셨는지,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셨는지… 전부요.”

김 노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지호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의 모든 계획이, 그의 모든 희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지켜왔던 연극이,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허물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연우가 지금까지 계속 절 찾아왔던 겁니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네. 아가씨는 도련님에게 진실을 듣고 싶어 합니다. 묻어두지 말고, 도련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그렇게 울면서 빌었습니다.”

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꽃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평온함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눈꽃 하나하나가 그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썼는가, 너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군고구마 봉투가 차가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온기는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만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김 노인은 지호의 굳게 다문 입술과 떨리는 손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도련님… 이제는 아가씨를 만나주세요. 더 이상 혼자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건 아가씨에게도, 도련님에게도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과도 같았다. 지호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했다. 눈발은 더욱 거세지며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그 안에서 그는 잃어버렸던 시간과,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랑과 마주해야 했다.

문득, 정원 너머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하얀 눈밭 위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하얀 숨을 뱉으며 이 집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 서연우였다. 그녀는 한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난 하얀 꽃잎들이 그녀의 작은 손안에서 가녀리게 흔들렸다.

지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서렸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끈질기게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이는 듯했으나, 멈추지 않고 지호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그를 짓눌렀던 거짓의 껍데기가 벗겨지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모든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뜨거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눈밭을 가로지르던 연우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가에 서 있는 지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수많은 세월이 스쳐 지나가고, 쌓였던 오해와 그리움이 그 눈빛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차가운 눈꽃 속에서, 마침내 두 사람의 오래된 약속이 다시금 숨을 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