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679화

차가운 바람, 뜨거운 눈물

한밤중의 정적은 늘 지혜에게 가장 솔직한 그림자였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 오래된 일기장은 숨죽인 채 펼쳐져 있었다. 누런 종이 위, 할머니 순옥의 손글씨는 오늘따라 유난히 힘겹게 비틀려 있었다. 지혜의 눈길이 한 줄 한 줄 따라 내려갈 때마다, 뼈와 살이 깎이는 듯한 고통이 글자마다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오늘 발견한 페이지는 여태껏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읽어온 모든 기록 중 가장 충격적이고, 동시에 가장 애달픈 고백이었다. 낡은 종이의 모서리가 닳아 헤어진 만큼, 그 안에 담긴 사연 또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할머니의 가슴을 찢어 놓았을 터였다.


“차디찬 바람이 불던 그 겨울, 나는 작은 아이의 손을 놓아야만 했다. 내 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었으나,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살 길이라 믿었다. 영미… 내 첫째 아이, 부디 좋은 곳에서 무탈하게 자라다오. 어미는 너를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단다. 내 평생의 빚, 그리고 영원한 그리움.”

영미. 그 이름이 지혜의 뇌리에 박히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첫째 딸이 있었다니? 단 한 번도 집안에서 언급된 적 없는 이름이었다. 지혜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 할아버지마저도 이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지혜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일기장을 붙잡았다. 차가운 종이의 감촉이 할머니의 오랜 슬픔처럼 가슴을 에워쌌다. 할머니는 그 거대한 비밀을 홀로 품고 살아오셨던 것이다. 수십 년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오직 이 낡은 일기장에만 눈물을 쏟아내셨던 것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항상 따뜻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가끔 먼 곳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슬픈 미소를 지으시곤 했지만, 지혜는 그것이 그저 인생의 고단함에서 오는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을 뿐이었다. 이제야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깊은 상실감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잊혀진 이름, 다시 새겨지다

일기장을 거슬러 올라가자, 띄엄띄엄 나타나는 단서들이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전쟁 직후의 혼란과 가난, 어린 할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세상의 무게.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려야 했던 처절한 선택. 영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순옥 할머니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온,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깊은 사랑과 희생이었다.

지혜는 할머니가 생전에 직접 엮어주셨던 낡은 천 조각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 이불 한 조각 한 조각에도 할머니의 한숨과 눈물이 스며있었을까. 할머니는 왜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혹은 상처가 될까 봐 염려하셨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침묵하며 살아왔을 할머니의 삶이 지혜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할머니…”

메마른 목소리로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차가운 방안에 지혜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할머니가 남긴 이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살아 숨 쉬는 심장이었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했던 가장 여리고 아픈 부분이었다.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조심스러운 노크.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서준뿐이었다. 지혜는 서둘러 눈물을 닦았지만, 이미 붉어진 눈가는 숨길 수 없었다.

“지혜 씨, 아직 안 주무세요? 불이 켜져 있길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문이 살짝 열리며 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혜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울어요? 어디 아파요?”

서준은 황급히 다가와 지혜 옆에 앉았다. 따뜻한 손이 지혜의 어깨를 감쌌다. 그 온기에 지혜는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서준 씨… 할머니한테… 할머니한테 첫째 딸이 있었대요. 이름은 영미… 가난하고 힘들어서…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보냈대요…”

지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지혜를 안아주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해주려 했지만, 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의 비밀, 그 깊이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지혜는, 앞으로 이 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낡은 일기장은 여전히 지혜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아직 다 읽지 못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영미, 그 잊혀진 이름이 지혜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할머니의 그리움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채.

(다음 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