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불빛이 아무리 찬란해도, 밤하늘의 별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이 작은 골목 끝, 낡은 간판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책과 LP’ 서점에서는 더욱 그랬다. 서점지기 지우는 익숙하게 카운터 뒤에 앉아,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밤도,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어김없이 그녀의 밤을 채우고 있었다.
제698화. 지우는 이 숫자가 주는 무게를 깊이 이해했다. 수많은 밤들, 수많은 사연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똥별 같은 이야기들이 이 주파수를 타고 흘렀을 것이다. 그녀에게 이 라디오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등대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잊힌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주는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찾고 있는 그 희미한 자장가 멜로디의 잔향을 품고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겼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는 늦은 귀가자들이 총총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점 안은 고요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갓 내린 커피 향이 뒤섞여 독특한 평온함을 자아냈다. 지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며칠 전, 라디오 진행자 별지기님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습니다’라는 특별한 코너를 시작한다고 공지했다. 사연을 보내면 직접 읽어주고,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도 보내볼까.’
망설임은 길었다. 수십 년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너무나 희미해서 실체가 불분명한 기억 조각들을 언어로 풀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옅은 햇살이 드는 방에서 나를 안아주던 따뜻한 품, 나직이 읊조려주던 알 수 없는 언어의 자장가,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은하수를 담은 듯 깊고 다정한 눈동자. 그것이 전부였다. 가족들은 그녀가 갓난아기 때 부모님을 잃었고, 자신들이 보살펴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지우의 기억 속에는 그 ‘따뜻한 품’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녀는 늘 그것이 꿈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 존재했음을 확신했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별지기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오늘 밤, 별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한 청취자분의 사연입니다. 이름 없는 멜로디가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를 바라며….”
지우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보낸 사연은 아니었지만,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사연이었다.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어릴 적, 저를 안아주던 분을 찾고 있습니다…’ 였다. 그녀의 가슴속 깊이 잠자고 있던 모든 그리움과 물음표들이 펜 끝을 타고 종이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그녀는 봉투에 사연을 담았다.
다음 날, 우체국에 들렀다 서점으로 돌아온 지우는 뜻밖의 택배 상자를 발견했다. 발신자는 불분명했고, 주소는 서점 주소와 ‘서점지기 지우에게’라고만 적혀 있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보낸 건가? 아니, 라디오 사연은 메일이나 게시판으로 받는다 했던 것 같은데. 의아함을 안고 상자를 뜯었다. 낡은 상자 안에는 에어캡에 둘러싸인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있었다. 상자 위에는 ‘오래된 멜로디를 사랑하는 소녀에게’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자신이 라디오에 보낸 사연에 대한 답장인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바래고 낡은 사진 한 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지우는 그 여인의 눈동자에서 낯설지 않은 따스함을 느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여인의 얼굴은 그녀의 희미한 기억 속 ‘그녀’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사진 속 아기는 분명 자신이었다. 품에 안겨 있는 아기의 작고 통통한 손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펜으로 쓴 듯한 흐릿한 글씨가 보였다. ‘은하 (Eunha)’. 그리고 그 아래에는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지도의 좌표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글귀가 더 적혀 있었다.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서, 너를 기다릴게.’
지우의 손에서 사진이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은하. 그 이름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그녀의 영혼을 떠돌던 그리움의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이름이 ‘은하’였구나. 그리고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 마치 라디오 프로그램 이름처럼, 운명처럼 들렸다.
지우는 손에 든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 속 여인의 미소는 너무나 다정했고, 그녀가 찾던 그 따뜻한 품이 거기서 느껴지는 듯했다. 수십 년을 기다려온 대답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형태로, 마치 별똥별처럼 그녀에게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이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이 어디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라디오가 그녀에게 길을 알려주었듯이, 이제 그녀는 이 희미한 단서를 따라가야만 했다.
어둠이 짙어지고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지우는 사진을 가슴에 품고 서점 문을 잠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지만, 그녀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그녀의 앞길을 밝혀주는 듯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별지기입니다. 오늘 밤도, 잊히지 않을 추억과 함께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별지기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이제 시작이었다. 지우는 숨겨진 퍼즐 조각을 찾아, 미지의 길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녀의 심장은 벅찬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