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687화

창문 밖은 이미 진회색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거리를 비추는 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뺨을 스쳤다. 지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래된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은 유난히 마음이 복잡한 날이었다. 낡은 종이 위에는 희미한 연필 자국들,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낙서들이 빼곡했다. 그 모든 것이 수십 년 전의 자신에게서 온 편지 같았다.

낯익은 그림자

그때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먀아옹.’ 길게 늘어진 울음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지우는 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습관처럼 굳어진 저녁 의식이었다. 창문을 열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윤기 나는 털, 별처럼 빛나는 노란 눈동자. 그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창턱에 앉아 지우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왔어, 그 애?” 지우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 애는 대답 대신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긴 하루를 보낸 고양이 특유의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지우는 늘 놓아두던 작은 접시에 따뜻한 우유를 따랐다. 그 애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혀를 날름거리며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지우에게는 세상 어떤 음악보다도 위안이 되었다.

시간의 무게

그 애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지우는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고민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희미해져 가는 꿈들. 페이지를 넘길수록 지난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왔다. 오늘, 오래전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과거의 어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의 지우는 지금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패기 넘쳤지만, 동시에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순간의 결정은 두고두고 후회로 남아 있었다.

“내가 그때 좀 더 현명했더라면, 어땠을까?” 지우는 중얼거렸다. 그 애는 우유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는 만족스러운 듯 꼬리를 살랑였다. 그리고는 지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노란 눈동자 속에서, 지우는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네.” 지우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지만 후회는 늘 남잖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너무 아파.”

그 애는 천천히 지우에게 다가와 바짓가랑이에 몸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따뜻하게 전해져왔다. 마치 ‘괜찮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고양이의 철학

“넌 후회라는 걸 아니?” 지우는 그 애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지우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 애는 기분 좋은 골골송을 부르며 지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아마 너는 그런 복잡한 감정 따위는 모를 거야. 그저 햇볕 아래서 잠자고,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는 게 전부겠지. 어쩌면 그게 더 현명한 걸지도 몰라.”

그 애는 지우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지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눈빛은 늘 그래왔듯이, 지우에게 어떤 답을 제시하는 대신,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이 순간.’ 그런 고양이만의 철학이 그 눈빛에 담겨 있는 듯했다.

지우는 그 애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주었다. “그래, 어쩌면 네 말대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실수에 얽매여 현재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테니까.”

별이 되는 시간

창밖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낙엽이 뒹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저물겠지. 지우는 무릎 위의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 작은 생명체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교감,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 그 애는 지우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마워, 늘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지우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애는 다시 한 번 기분 좋게 골골거리며, 마치 ‘당연한 걸 뭘 새삼스럽게’라고 말하는 듯 지우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지우는 일기장을 덮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민들과 후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전처럼 지우를 짓누르지는 않았다. 그 애의 따뜻한 온기와 말 없는 위로 덕분이었다. 먼 훗날, 이 모든 시간이 별처럼 빛나기를 바라며, 지우는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밤은 깊어지고, 그 애의 노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그 밤의 대화는 그렇게, 또 한 페이지를 채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