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688화

강태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낡은 가죽 수첩을 책상 위로 던졌다. 탁, 하는 소리가 깊은 밤의 사무실 정적을 갈랐다. 탁상 스탠드의 외로운 불빛 아래, 수첩 속 흑백 사진 속 서연의 미소가 비현실적으로 반짝였다. 688번째 밤,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밤들을 이렇게 보내왔을 것이다.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불빛은 마치 그의 가슴속에 드리워진 셀 수 없는 희망과 좌절의 점멸 같았다.

며칠 전, 그는 폐업 직전의 낡은 레코드 가게에서 우연히 한 장의 낡은 LP판을 발견했다. 그 판의 비닐 커버에는 누군가의 낙서가 흐릿하게 남아있었는데, 바로 서연이 즐겨 쓰던 특유의 필체로 적힌 짧은 시 한 구절이었다. “푸른 새벽을 닮은 그대, 나의 유일한 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수십 년 전, 어린 서연이 썼던 그 문장이 먼지 쌓인 LP판에서 발견될 확률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레코드 가게 주인을 밤새도록 붙잡고 물었지만, 주인은 기억을 더듬으며 “한 아주머니가 오래전에 맡겨두고 가셨는데, 찾으러 오지 않아서 그냥 방치했어요”라는 무미건조한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다.

태우는 손가락으로 LP판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서연은 음악을 사랑했고, 특히 클래식보다는 포크송이나 재즈를 즐겨 들었다. 이 LP판은 낯선 재즈 앨범이었다. 그녀의 취향과 맞지 않는 앨범에 왜 그녀의 필체가 남아있을까. 혹시 그 가게에 다시 왔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주려고 했던 걸까?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사소한 단서 하나가 그를 다시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이끌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연기를 들이쉬는 대신, 그저 필터를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688번째 장에서 그는 여전히 서연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탐정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타인의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도구가 되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였다. 처음에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했던 이 추적이 이제는 그의 존재 자체가 되어버렸다. 때로는 자신이 서연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벽에 걸린 지도에는 붉은색 핀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그가 서연의 흔적을 찾아 헤맨 발자취를 보여주는 지도였다. 그 수많은 핀 중, 새로운 핀 하나를 레코드 가게가 있던 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그 옆에, 희미하게 빛나는 핀 하나를 더 추가했다. LP판 안쪽, 아주 작게 인쇄된 음반사의 이름과 당시 음반사 대표의 이름이 태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된 이름, 하지만 아직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 레코드 가게는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라, 서연이 한때 머물렀던, 혹은 그녀의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벽 두 시, 태우는 사무실을 나섰다. 낡은 코트를 여미고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래된 재즈 음반사를 찾아가는 길. 지도에 표시된 주소는 도시의 변두리, 잊힌 듯한 골목길에 있었다. 낡은 건물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니, 과거의 영광은 간데없고 허름한 공장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직감이 맞기를 간절히 빌면서, 태우는 어둠 속을 걸었다. 그의 등 뒤로, 서울의 밤은 끝없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그의 외로운 그림자를 더욱 길게 늘어뜨릴 뿐이었다.

오래된 공장 건물들 사이에, 기이하게도 홀로 깔끔하게 정돈된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없었지만, 낡은 창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불빛은 마치 그의 오랜 갈증을 달래줄 샘물처럼 느껴졌다. 태우는 멈춰 서서 건물 외벽을 찬찬히 살폈다. 녹슨 철문에는 굳게 잠긴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옆쪽에 난 작은 출입문은 안에서 잠겨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에서는 낡은 오디오 장비의 미미한 전원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낯익은 멜로디의 잔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바로 LP판에서 흘러나오던 그 재즈곡이었다.

어둠 속, 누군가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작업하는 듯한 뒷모습. 태우는 숨을 죽였다. 서연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녀의 흔적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 낯선 공간에서 서연의 그림자가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한 발자국, 아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녹음기와 알 수 없는 기계음, 그리고 먼지 쌓인 LP판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 뒷모습의 인물이 천천히 돌아섰다.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의 시선은 태우의 손에 들린 LP판으로 향했다.

“오랜만이군요, 이 음반.”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지만, 묘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참 좋아했었는데.”

그녀. 노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태우의 심장을 다시 한번 쿵, 하고 떨어뜨렸다. 서연일까. 아니면 또 다른 그녀일까. 수많은 물음표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마침내, 688번째 밤의 끝에서,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던 희미한 빛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두려움도 함께 밀려왔다. 그는 침묵하며 노인을 응시했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도, 그의 추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