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 – 제709화

깊어지는 가을밤, ‘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의 고요는 한층 더 짙어졌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먼지 앉은 낡은 진열장 위에서 부서졌다. 수백, 수천 가지의 사연을 품은 물건들이 숨 쉬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억의 박물관이었다. 민아는 익숙하게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앤티크 램프의 불을 낮췄다. 오래된 종이와 나무, 금속의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편안하게 폐부를 채웠다.

“영감님,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네요.”

민아의 말에 계산대 옆 흔들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던 김영감이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얇은 무릎담요 아래로 그의 손가락이 가만히 탁자 위 작은 물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민아는 가까이 다가가 그 물건을 보았다. 낡고, 윤기 없는 은빛 회중시계였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값비싸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견뎌낸 고물에 가까웠다.

사연을 품은 회중시계

“새로 들어온 물건인가요? 평소라면 영감님께서 이리 조용히 지켜볼 리 없는데.”

민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유리알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시침과 분침은 제멋대로 뒤엉켜 멈춰 있었다. 용두는 녹슬어 더 이상 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 흔한 각인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계였다.

“새로 들어온 것이 아니지. 어느 날, 밤새 내 가게 탁자 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앉았더군.”

김영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울림이 있었다. 민아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물건이 스스로 가게로 들어온다니, 김영감이 가끔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중 하나일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이야기에 알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말요? 제가 어제 저녁에도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 시계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게야. 혹은, 이 시계가 품은 시간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김영감은 시계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려 민아에게 내밀었다. 민아가 시계를 받아들자, 손안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동시에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인가 싶어 귀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멈춰버린, 죽은 시계일 뿐이었다.

“어떤 사연을 품고 있기에 이리 홀로 찾아왔을까요?” 민아는 중얼거렸다. “혹시 누군가 이곳에 두고 간 물건일까요?”

김영감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물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과거를 간직하지. 이 시계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그 과거를 움켜쥐고 있는 듯하구나.”

시간의 역류

그때였다. 가게 문에 달린 작은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늦은 시간,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민아는 살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한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짙은 코트를 입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시대에 맞지 않는 듯한,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몽환적인 눈빛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찾아 헤맨 사람처럼, 혹은 꿈속에서나 본 풍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그녀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민아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로 향했다. 서현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그녀는 천천히 민아에게 다가왔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혹시… 이 시계… 제가 찾던 것일까요?”

서현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그녀는 민아에게서 시계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녹슬어 움직일 수 없었던 용두에서 미약한 불빛이 깜빡이더니, 멈춰 있던 시계 바늘이 ‘틱, 틱’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바늘이 움직이는 방향은 시계 방향이 아니었다. 분명 과거를 향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민아는 숨을 삼켰다. 김영감은 그저 조용히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현의 눈빛은 순식간에 깊은 안개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절망이 교차했다. 그녀는 시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소리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몽환적인 소리처럼 들렸다. 서현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너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그녀는 과거의 한 조각을 직접 보고 있는 듯했다. 민아의 눈에는 서현의 주변에서 희미한 빛의 파동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녀를 감싸는 공간이 일렁이며 과거의 한 장면을 투영하려는 듯했다. 서현의 표정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돌아갈 수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어리석은 말을 후회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서현의 목소리는 이제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녀는 시계를 꽉 그러쥐었다.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 바늘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했다. 민아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서현의 에너지가, 혹은 그녀의 시간이 시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련을 놓아주다

“멈춰라.”

김영감의 목소리가 고요한 가게를 울렸다. 단 두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강렬한 힘과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꾸로 맹렬히 돌던 시계 바늘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서현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깨달음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돌아갈 수 없어…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은…”

서현은 시계를 힘없이 놓았다. 민아가 재빨리 시계를 받아들었다. 시계 바늘은 더 이상 거꾸로 돌지 않았다. 멈춰 선 채, 그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서현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슬픔보다는, 오랜 미련을 놓아주는 해방감에 가까워 보였다.

“이 시계… 어쩌면… 그 사람이… 제가 오기를 기다리며 남겨둔 마지막 마음이었나 봐요. 저에게 과거를 되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던 저를 꺼내주기 위한…”

서현은 김영감과 민아를 번갈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에 묶여 허우적대는 듯한 위태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 하나가 내려앉은 듯, 한결 가벼워 보였다.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군요.”

서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뒤돌아 가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풍경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가게 안에는 짙은 여운이 감돌았다. 민아는 손에 들린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시계 바늘은 멈춰 있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영감님… 저 시계가… 이제 제대로 가는 거예요?”

김영감은 다시 흔들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래, 이제 제 길을 가는 게야. 더 이상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온전한 현재를 살아가기로 택한 자에게서 그 빛을 얻었으니… 이곳은 그저, 시간을 붙잡는 곳이 아니라,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단다.”

민아는 고요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낡고 볼품없는 은빛 회중시계는 이제 서서히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 작은 시계 안에 담겨 있던 지난한 세월의 미련과, 그것을 놓아준 한 여인의 용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이들의 마음속에서 잠시 멈췄을 뿐. 그리고 이 골동품 가게는, 그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