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124화

이안은 차가운 금속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발아래에서 희미하게 진동하는 기계음은 마치 그의 잊힌 기억들이 발버둥 치는 소리 같았다.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시간의 회랑은 형형색색의 빛줄기로 가득했지만, 그 어떤 빛도 그의 내면의 어둠을 밝히지 못했다.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거울처럼 반사되며 과거와 미래의 잔상을 어지럽게 투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에게 그 모든 것은 단지 의미 없는 빛의 유희일 뿐이었다.

“다시… 실패인가.”

메마른 목소리가 텅 빈 회랑에 울렸다. 시간 동조 장치의 수치는 요동치다 이내 평형을 찾았고, 이안의 손에 쥐여 있던 작은 수정구는 빛을 잃었다. 수없이 시도했던 일이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들. 그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이 때로는 달콤한 꿈처럼, 때로는 잔혹한 악몽처럼 그를 찾아왔지만, 완전한 실체는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회랑 저편에서 흐릿한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갈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 형체는 이안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그러나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환영처럼.

“이안… 아직도 그 고통 속에 갇혀 있나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내디디자, 회랑의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차분한 눈빛, 오래된 상처처럼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 그는 바로 이안의 마지막 기억 조각 속에 늘 존재했던,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과거의 자신 혹은 미래의 자신, 혹은 그 모든 것의 총체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지탱하는 것이 힘겨웠지만, 눈은 그림자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거지?”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무거운 체념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어요. 기억, 사랑, 그리고… 시간의 균형을 지키겠다는 맹세까지도.”

맹세… 그 단어가 이안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텅 비어 있던 곳에 무언가 스며드는 듯한 기분. 뜨거운 불꽃이 그의 뇌리에서 피어나는 것 같았다. 순간, 수많은 이미지가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시간의 톱니바퀴, 멸망의 위기에 처한 도시, 그리고… 한 여인의 얼굴.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안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니… 아니야…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어. 그녀를… 지켜야만 했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각난 기억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에 휩싸였다.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무게는 그의 존재 자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림자는 이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 같은 손길이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었지만, 당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요. 시간의 수호자 이안… 당신의 맹세는 아직 유효해요. 비록 그 대가가 얼마나 가혹할지라도.”

시간의 수호자. 그 단어는 그의 뇌리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모든 세포가 반응하는 듯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이안은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들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맹세… 무엇을 위한 맹세인가?”

그림자는 회랑 저편, 빛으로 가득한 미지의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든 시간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당신은 그 임무를 위해 스스로 기억을 봉인한 채 여기까지 왔어요. 모든 혼란의 시작이자 끝이 될 그곳으로…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거나… 혹은 영원히 사라지겠죠.”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는다는 희망과,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한 줄기 의지가 피어났다. 그 여인의 얼굴. 그를 죄책감으로 짓누르던 그 이름 모를 여인을 떠올리자,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든, 임무였든, 혹은 그저 남아 있는 인간적인 조각이었든, 그는 그녀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더 이상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림자는 그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슬펐지만, 동시에 결연했다. “결정은 당신의 몫입니다, 이안. 하지만 기억하세요.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당신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에요.”

회랑 저편의 빛은 강렬해지며 이안을 빨아들일 듯 일렁였다. 그 빛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완전한 해방일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지. 하지만 이안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그를 이끌었고, 알 수 없는 맹세의 무게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미지의 빛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마지막을 향해.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수정구는 다시 한번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희망의 불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