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708화

오래된 붓끝의 흔들림

이른 아침, 고요한 산자락을 휘감고 도는 봄바람이 이진우 화백의 작업실 창문을 살포시 두드렸다. 햇살은 아직 잠에 취한 듯 옅었고, 대신 수묵화처럼 옅은 안개가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진우는 차가운 손으로 닳고 닳은 붓을 쥐었다. 창밖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려 했으나, 붓끝은 쉽사리 먹을 머금지 못하고 공중에서 맴돌았다. 벌써 십 년째였다. 그의 붓은 그날 이후로 꽃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겨울의 엄격한 한기가 물러가고, 대신 촉촉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실내로 스며들었다. 작업실 한편에 놓인 난초 화분에서는 연두색 새순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하는 계절. 하지만 진우의 마음은 여전히 지난 겨울의 얼음 조각에 갇힌 듯 차가웠다.

그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작업실 벽 한쪽에 걸린 빛바랜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 속에는 맑게 웃는 소녀와 젊은 시절의 그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설아.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그의 삶의 전부였던 손녀. 십 년 전, 그 봄날의 시작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아이.

그날 이후, 진우의 그림은 깊이를 더했지만, 그 안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었다. 봄은 그에게 늘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희망과 재생의 상징인 봄이 그에게는 상실과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꽃잎에 실려 온 향기

그때였다.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작업실 안을 한 바퀴 휘돌았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그 바람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잊고 지냈던, 그러나 단 한 번도 그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 적 없는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아련하고 달콤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애달픈 향기. 진우의 낡은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산지대의 해묵은 벚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잎이 품은 향기였다. 여린 분홍빛과 은은한 연보랏빛이 뒤섞인 듯한 그 독특한 향은 설아만이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장소, 해마다 봄이면 둘이 함께 찾아가던 작은 봉우리 위 외딴 벚나무 숲에서만 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창턱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그 벚나무 숲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아…” 그의 입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그저 환청일까? 향기는 바람처럼 스쳤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 순간, 또 다른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작업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작고 하얀 종이 한 조각. 그것은 갓 피어난 봉오리처럼 섬세하게 접혀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완벽한 형태의 종이학이었다. 깃털 하나하나, 날개 끝의 주름까지도 살아있는 듯한 정교함. 설아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접어 그에게 선물했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던 종이학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람이 전해준 단순한 향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소식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어쩌면 다시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체념했던, 바로 그 소식이었다.

희망의 그림자 속으로

진우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의 굳은 몸은 마치 젊은 시절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붓을 놓은 채, 그는 허둥지둥 작업실을 나섰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그의 그림자도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길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었지만, 곳곳에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산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했다. 설아가 즐겨 찾던 그 비밀스러운 벚나무 숲.

길은 멀고 험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그의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지친 기색보다 더 강렬한 희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혹시, 정말 설아가 거기에 있을까?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 그의 아픔을 알고 장난을 치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작은 종이학 하나가 그의 모든 의심과 절망을 밀어냈다.

마침내, 능선의 끝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진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희귀한 벚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작은 봉우리는 연분홍빛 구름을 드리운 듯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꽃잎들이 비처럼 흩날리며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향기. 여기, 이 공간 가득히 충만했다.

그리고 벚꽃나무 아래, 그림자처럼 서 있는 작은 형체가 있었다.

진우의 시선이 그곳에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그의 거친 숨소리마저도. 오직 심장이 터질 듯이 울리는 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그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그 형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그 형체의 윤곽이 더욱 선명해졌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여린 어깨선,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

설아였다.

아니, 설아일 리가 없었다. 십 년이 흘렀다. 그 아이는 이미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저 형체는 너무나도 어릴 적 설아와 닮아 있었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모습 그대로. 진우는 눈을 비볐다. 환상이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 사이로,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상자 위에는, 방금 진우의 작업실로 날아들었던 것과 똑같은 종이학 수십 마리가 놓여 있었다. 바람이 한 마리를 들어 올려 진우의 발치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진우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희망과 두려움, 그리움과 충격이 뒤섞여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저 형체는 누구인가? 설아인가? 아니면 설아가 보낸 다른 누군가인가? 그는 목이 메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저 벚꽃 잎이 흩날리는 저 언덕 아래, 오랜 시간 잊었던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봄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왔다. 그 바람은 지난 십 년의 세월을 지나온 모든 이야기를,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들을 속삭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