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는 지혜의 불안한 심정을 더욱 흔들었다. 낡은 탁상스탠드의 희미한 불빛 아래,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지혜의 손가락은 닳고 닳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이제는 페이지의 모서리가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번을 읽고 또 읽었을 이 글씨들에서 매번 새로운 슬픔과 이해를 발견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몇 날 며칠을 망설였던 부분이었다. 할머니의 필체는 이 부분에 이르러 더욱 격정적이고 떨리는 듯했다. 지혜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글자를 따라 내려갔다.
***
1958년 7월 15일, 비.
영호 씨, 그대를 두고 떠나온 지 벌써 삼 년. 바닷가의 그 작은 집에서 함께 보냈던 여름밤들은 여전히 내 심장에 뜨겁게 새겨져 있건만, 나는 오늘 또다시 그 꿈을 꾸었다.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던 우리의 보금자리, 그대를 품에 안고 속삭이던 맹세들. 모든 것이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어째서 현실은 이리도 잔인한가.
어머니의 병환은 날마다 깊어지고, 동생들의 학비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읍내 이장님 댁의 셋째 아들과의 혼담은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이자, 우리 가족의 유일한 활로였다. 그와의 혼인을 통해 약값을 마련하고, 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에, 내 눈앞은 캄캄했다.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사랑만을 좇아 가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영호 씨, 그대가 내게 주었던 마지막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바다를 지키겠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는지 모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은 칼날이 되어 나를 찔렀다. 나는 결국 그 편지를 찢어 바다에 띄웠다. 내 마음의 갈기갈기 찢긴 조각들과 함께.
그날 밤, 나는 몰래 보따리를 싸 들고 정든 바닷가 마을을 떠났다. 그대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넬 용기가 없었다. 내 이기적인 선택이 그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지 알았기에, 차마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뒤돌아볼 수 없었다. 그대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것을 등지고, 나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바다를 보며, 내 마음속의 바다도 함께 메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나약한 나의 선택이었을까. 사랑을 저버린 죄,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위선. 나는 과연 올바른 길을 택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저 가장 쉬운 길을 택한 겁쟁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호 씨, 부디 나를 용서해 주오. 그리고 부디 행복하시오. 언젠가 먼 훗날, 이 모든 슬픔이 바다 거품처럼 사라지고,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를. 나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는 지혜의 눈에서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고통이 활자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토록 강인하고, 언제나 웃음 짓던 할머니에게 이토록 사무치는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니. 지혜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영호 씨. 단 한 번도 가족들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할머니의 첫사랑이자, 어쩌면 평생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누구보다도 소중했을 남자. 지혜는 할머니가 왜 그토록 바다를 좋아했는지, 왜 가끔씩 먼 바다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곤 했는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지혜는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지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찢어진 편지를 바다에 띄웠다는 대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할머니는 그 순간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영호 씨는, 과연 할머니를 기다렸을까. 아니면, 할머니의 예상대로 다른 삶을 살아갔을까.
다음 날 아침, 지혜는 해가 뜨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어젯밤 일기장에서 언급된 ‘바닷가 마을’은 이제 지도 속에서 찾기 힘든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남긴 희미한 단서와 기억의 조각들을 조합해, 지혜는 그곳이 서해 어느 한적한 곳임을 직감했다. 하준에게 연락해 어렴풋한 정보를 공유하자, 그는 이미 자료를 찾고 있었다며, 거의 확신에 가까운 한 마을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곳은 지도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름조차 생소한 ‘잔잔포’라는 곳이었다.
낡은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길을 잃었고, 지혜는 여러 번 헤매고 나서야 겨우 마을 어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잔잔포’라는 이름처럼, 바다는 거짓말처럼 잔잔했다. 작은 포구에는 낡은 어선 몇 척이 평화롭게 떠 있었고,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이 지혜의 뺨을 스쳤다. 마치 할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했다. 길을 걷다 만난 할머니 몇 분에게 ‘영호 씨’라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부분 고개를 젓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뿐이었다. 지혜는 점점 낙담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토록 절절한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이상, 그 끝을 보고 싶었다. 영호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할머니가 평생 묻어두었던 그 이야기에 과연 마침표가 찍힐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작은 어촌 마을의 골목길을 걷다, 지혜의 눈에 유난히 낡고 오래된 가게가 들어왔다. 간판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바래 있었지만,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노파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곱게 땋아 올린 흰 머리에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인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이 마을에 오래 사셨어요?”
노파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릿한 눈빛이었지만, 지혜를 훑어보는 시선은 예리했다.
“그래, 평생을 여기서 살았지. 뉘신데, 낯선 젊은 아가씨가 이 촌구석까지 찾아왔는고?”
지혜는 용기를 내어 할머니의 이름을 말했다. “제 할머니가 예전에 이 마을에 사셨다고 해서요. 이름이 김숙자입니다. 혹시… 아시나요?”
그 순간, 노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지혜를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숙자라… 그래, 숙자. 내가 그 이름을 들은 것이 언제였던가. 그 아이가… 결국 이렇게 너 같은 예쁜 손녀를 두었구나.”
지혜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드디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노파는 지혜의 얼굴을 매만지듯 바라보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이름이… 미정입니다.” 지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준이 보내준 자료에서 이 마을에 김숙자 할머니의 친구였던 ‘박미정’이라는 분이 계셨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분이….
“미정? 그래, 내가 미정이다. 박미정. 숙자와는 둘도 없는 벗이었지.” 노파, 미정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그리움과 함께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숙자가… 너에게 영호 이야기를 했더냐?”
지혜는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나온 그 이름, 영호. 미정 할머니는 숙자 할머니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기장에서 읽은 내용을 짧게 요약했다. 미정 할머니는 지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뜨며, 지혜의 손을 잡았다.
“숙자는 평생을 아파하며 살았지. 그 아이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르렀는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을 게다. 하지만 영호는… 영호는 숙자가 떠난 뒤로도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며 살았어.”
지혜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영호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할머니를 기다리다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미정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숙자가 떠나고 몇 해 뒤, 영호는 바다에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지. 그의 마지막 모습은… 숙자가 보낸 편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던 모습이었다오. 그가 늘 말했어. ‘언젠가는 숙자가 다시 돌아올 거야. 그날까지 나는 이 바다를 지킬 거야.’라고. 그리고 정말 바다에 몸을 맡겨 버렸지….”
미정 할머니의 말에 지혜는 숨이 턱 막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 슬픈 사랑이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줄이야. 지혜는 눈물이 차올라 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영호 씨는 할머니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바다에서 영원히 잠든 것이었다.
“하지만….” 미정 할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 숙자가 남기고 간 것이 하나 있어. 영호가 그걸 평생 간직했지. 숙자를 향한 그의 마지막 희망이자, 너의 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어.”
미정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낡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혜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할머니는 먼지 쌓인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낡은 천 조각에 싸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미정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천을 풀었다. 그 안에는 바닷바람에 닳고 닳은, 하지만 정성스레 보관되어 온 작은 나무 조각이 있었다. 조각의 한쪽 면에는 서툰 글씨로 새겨진 두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숙 자’
그것은 할머니가 떠나기 전, 영호 씨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나무 조각 아래에는 낡고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미정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지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그 종이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할머니의 일기장에도 나오지 않았던,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