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725화

얼어붙은 호수의 부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디흰 눈송이들이 솜털처럼 흩날리다 이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며 쌓이고 있었다. 오래된 기와지붕 위에도, 마당 가득 심어둔 동백나무 가지 위에도, 그리고 저 멀리 언덕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느티나무 숲에도 눈은 겹겹이 쌓여갔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뜨거웠다.
이런 날이었다. 딱 이런 날이었다.

“지원…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얼어붙은 호수 위 버드나무가 온통 하얗게 뒤덮이는 그 날,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야.”

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십여 년 전, 아니,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전,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현우는 내 손을 잡고 그렇게 속삭였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세상은 너무 잔혹했으며, 우리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힘보다 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연약했다.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지는 724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나는 그 약속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루로 나가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다. 우리 집 마당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으로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는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호수 한가운데, 수많은 이야기가 깃든 늙은 버드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오늘, 그 버드나무는 눈꽃으로 완벽하게 뒤덮여 있었다. 현우가 말했던 ‘그 날’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침묵 속의 전율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손끝의 미세한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 기다림이 나의 존재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현우와의 약속은, 내가 힘든 시간을 견디고, 절망의 나락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등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약속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현우가 돌아오면, 우리의 과거를 쫓던 어두운 그림자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때였다. 닫힌 대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워낙 많이 쌓여 인기척조차 들리기 어려운 날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 조용한 산골 마을에, 이런 날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귀청이 터질 듯 울렸다. 현우일까? 아니면… 그들일까?

조심스럽게 대문으로 다가갔다. 빗장이 걸린 틈새로 밖을 내다봤지만,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다시금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대문 아래, 눈 위에 놓인 작은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임 끝에 대문을 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눈 위에 놓인 것은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 새 한 마리였다. 새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 넘쳤다. 익숙했다. 너무나 익숙해서 손끝이 저릿했다.

현우가 어린 시절, 나에게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나무 새와 똑같았다.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보내며 조심스럽게 깎아 만들었던, 우리의 추억이 깃든 그 새. 이 새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현우가 나에게 보냈던 수많은 비밀 신호 중,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은밀하며,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나는 돌아왔다. 그리고 위험이 우리를 쫓고 있다.’

갈림길에 선 마음

나무 새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손안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듯했다. 현우는 정말 돌아온 것일까? 이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 이토록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희망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현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순수한 기쁨,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벅찬 감격… 하지만 그 파도 뒤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이 작은 오두막에서 나름의 평화를 찾아왔다. 그림을 그리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마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잊힌 과거를 봉인하려 애썼다. 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잠시 묻어두려 한 것이다. 현우와 나를 갈라놓았던 그 무시무시한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아주 미약하지만 나만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 새는 그 성벽에 난 균열이었다. 현우의 귀환은 나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현우를 만나면, 우리는 다시 그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도피와 불안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눈은 여전히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호수 위의 버드나무는 점점 더 눈꽃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그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지만, 내 안의 갈등은 격렬했다. 이 평화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약속을 좇아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나의 심장은 이성을 저버린 채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눈 위로 한 발짝 내디뎠다. 신발 아래로 눈이 밟히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그래, 현우. 나는 너를 찾아 나설 것이다.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우리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내 손안의 나무 새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저 얼어붙은 호수 위 버드나무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현우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겨내야 할 운명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연한 눈빛으로 눈 내리는 숲길을 응시했다. 나의 오랜 기다림은 이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