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709화

차가운 병실, 뜨거운 맹세

창밖으로 시리도록 흰 눈송이들이 춤추듯 흩날렸다. 희미한 병실 안, 창가에 기댄 지수의 마른 어깨 위로 하얀 눈밭에서 길어 올린 듯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창밖의 설경 대신, 침대에 깊이 잠들어 있는 하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미동 없는 가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생명 유지 장치의 초록 불빛뿐이었다. 지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겨울은 다시 돌아왔고, 눈꽃은 약속처럼 내렸지만, 그때의 따스한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했다.

“하준아…”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하준의 손을 덮었다. 언제나 뜨겁게 그녀를 감싸주던 그 손은 지금, 차갑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지난 사흘 밤낮을 이 병실에서 새며, 지수는 수없이 많은 과거의 조각들을 주웠다. 그 조각들 속에는 언제나 하얗게 눈이 내리던 날, 열여덟의 하준과 열일곱의 지수가 있었다. 작은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영원을 맹세했던 날. 그때 하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수야,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어떤 어둠이 덮쳐와도, 우리는 결국 이 겨울 눈꽃처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내가 널 찾아낼게. 꼭.”

그 약속 하나로 그녀는 수많은 절망의 계절을 버텨왔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잔인한 시험을 내던졌다. 하준은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를 지키려다 쓰러졌다. 그리고 의사는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지수는 고개를 숙여 하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피부에 스며들었다. “이럴 수는 없어, 하준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 우리 아직… 우리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 많잖아.”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한 박사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지수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한 박사는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다.

“오늘 아침 검사 결과… 뇌압이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지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위험천만한 수술이었다. 성공률은 지극히 낮고, 실패할 경우 하준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 더 나쁜 결과가 기다릴 수도 있었다.

“수술… 해야만 하나요?”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질문이었지만, 매번 그 무게는 심장을 짓눌렀다. 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시간을 벌 수 없을 겁니다.”

시간. 그 잔인한 단어가 지수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는 하준과의 시간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짧은 행복, 그리고 다시 드리운 어둠. 그녀는 망설였다. 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를 잃을 수도 있었다. 대체 무엇이 옳은 길인가. 지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준이 의식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 지수야.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 이겨낼 수 있어.’

그녀는 다시 하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의 미소,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눈빛. 그 눈빛 속에 담겨 있던 용기와 믿음. 그래, 약속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준은 언제나 그녀에게 강해질 용기를 주었다. 그녀도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수술… 하겠습니다.” 지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한 박사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하준이라면…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그를 지켜줄 겁니다.” 그녀는 하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늘 그랬듯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준이는 돌아올 거예요.”

또 다른 그림자

그때, 병실 문이 다시 열리며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문턱에 선 선우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눈은 하준의 침대를 스쳐 지나, 지수의 얼굴에 박혔다. 그의 존재 자체가 차가운 그림자처럼 병실 안으로 드리워졌다.

“결국 수술을 결정했군.” 선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건가? 당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하준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지수는 그의 비난에 눈빛을 번뜩였다. “내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야. 이건… 하준이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 아니, 그건 당신이 하준을 놓지 못하는 미련일 뿐이야.” 선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경고했잖아. 당신 옆에 있으면 하준은 늘 불행해질 거라고. 내 말이 틀렸어?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

그의 말은 칼날처럼 지수의 심장을 찔렀다. 지난 세월 동안 선우는 끊임없이 그녀와 하준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하준을 향한 그의 비뚤어진 집착은 수많은 오해와 고통을 낳았다. 그리고 하준이 쓰러진 지금, 선우는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을 지수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다.

“닥쳐.” 지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하준이를 아끼는 마음이라면,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해.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준을 진정으로 아끼는 건 나뿐이야.” 선우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를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도 나고.” 그의 시선은 하준의 창백한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 순간, 지수는 그의 눈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광기를 읽었다.

“무슨 소리야?” 지수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선우는 천천히 하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하준의 손 위로 뻗어가는 순간, 지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손대지 마.”

“왜? 내가 하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게 그렇게 싫은가?” 선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혹시 당신도, 하준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래야 당신의 끔찍한 과거가 완벽하게 묻힐 테니까.”

지수는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딱’ 소리가 병실 안에 메아리쳤다. 선우는 충격을 받은 듯 지수를 바라보았다. “너… 감히…”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독으로 가득하구나.” 지수는 숨을 헐떡였다. “당신은 하준을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하준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나가. 당장 나가!”

선우는 분노와 모멸감에 가득 찬 눈으로 지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속삭였다. “후회하게 될 거야, 지수.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그때가 되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그는 마지막으로 하준을 한 번 더 훑어보더니, 차갑게 등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선우가 남긴 불길한 그림자는 병실 안에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수는 하준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심장은 거친 파도처럼 요동쳤다. 수술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선우의 비열한 위협은 또 다른 어둠을 예고하는 듯했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쉼 없이 내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함께 그렸던 미래를 위해, 지수는 이 모든 역경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 대신, 차가운 결의가 번뜩였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 단순한 맹세를 넘어 그녀의 모든 것을 건 싸움이 되었다. 과연, 이 혹독한 겨울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함께 눈꽃을 바라볼 수 있을까.

_다음 화에 계속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