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144화

침묵은 때로 가장 잔인한 소리였다. 시우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텅 빈 천장, 익숙한 듯 낯선 연구실의 흰 벽들이 그를 맞았다. 하지만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방의 모습이 아니었다. 찢겨진 필름 조각처럼, 강렬한 색채와 형상이 그의 망막에 들러붙어 있었다.

지윤.

그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혀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동시에, 아득한 심해처럼 깊은 슬픔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방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기억의 파편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갔다. 빗물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붉게 충혈된 눈시울, 그리고 애원하듯 뻗어오던 가느다란 손. “가지 마… 제발…” 흐느낌 섞인 그 음성은 메아리처럼 맴돌다 이내 아득히 멀어졌다. 손에 잡힐 듯 생생했지만, 정작 기억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 연기 같았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기억의 조각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의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누구에게 무엇을 했던 걸까? 그 여인은 왜 그리도 슬퍼했던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그는 그녀를 두고 떠났어야만 했을까? 조각난 퍼즐은 그에게 절망적인 갈증을 안겼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은 오히려 더 깊은 고통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연구실 문이 열렸다. 박 교수님이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묶여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시우의 고통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시우가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았다.

“시우 군, 또 그 기억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우려는 분명했다.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군. 이제는 이름까지 들리는 건가?”

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혼란과 고통으로 일렁이는 눈빛이었다. “교수님… 그녀가… 그녀의 이름이 지윤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뭘 한 거죠? 그녀는 왜… 왜 그리도 슬퍼했던 거죠?”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상처를 억지로 들춰낸 듯했다.

박 교수님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 속에는 무거운 슬픔이 스며 있었다. “지윤… 그래, 그녀는 너의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지. 너의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났고, 동시에 가장 어두웠던 부분이었어.”

가장 소중했고, 가장 어두웠다? 그 모순적인 설명은 시우의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거대한 에너지가 깨어나는 듯했다. 이 조각난 기억들이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것은 현재를 뒤흔들고, 미래를 바꾸려는 어떤 힘이었다.

“하지만 이 기억의 조각들이 너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어, 시우 군.” 박 교수님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은 퍼즐 조각이 아니야. 시간여행자가 과거의 자신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곧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다. 너는 이미 수많은 변칙점을 만들어냈고, 겨우 안정화된 시간선도 불안정해질 수 있어. 네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야.”

시우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지윤의 슬픔을 이해해야 한다는, 원초적인 갈망. 그것이 그에게는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같았다.

“사라진다 해도 괜찮아요.” 시우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단호했다. “제가 왜 그녀를 두고 떠났는지, 그녀가 왜 울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제 기억의 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서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 고통 속에서는 더 이상 살 수도 없고요.”

박 교수님은 시우의 결연한 눈빛을 말없이 응시했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온 그녀는 시우의 고통이 단순한 기억 상실 그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기억의 깊은 곳에는 시간의 흐름을 뒤흔들 치명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박 교수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네가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의 조각을 강하게 느꼈던 시간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 변칙점의 중심에서, 네가 무엇을 했는지, 지윤과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마주해야 해.”

시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토록 갈망했던 해답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 시간의 끝에는, 과연 어떤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잊어버린 시간의 조각은 그에게 구원이 될까, 아니면 파멸의 시작이 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는 반드시 그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익숙해진 시간 이동 장치의 흐릿한 윤곽이 보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그 장치를 향했다. 마치 그곳에 잊어버린 모든 기억과, 지윤의 눈물이 응축되어 있는 것처럼.

다시, 그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