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718화

도시의 가장 깊은 곳, 시간조차 길을 잃을 듯한 골목 어귀에 놓인 낡은 간판에는 ‘꿈을 파는 상점’이라는 글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발걸음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곳의 문을 열 용기를 낸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그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진우. 한때는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며 화폭 위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화가였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그의 세상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붓을 놓은 지 오래였고, 꿈조차 꾸지 못하는 밤이 수백 번 이어졌다. 그의 영혼은 메말라갔고, 지친 심장은 더 이상 아무것도 그려내려 하지 않았다.

상점 안은 몽환적인 안개로 가득했다. 은은한 향내가 공중에 떠다녔고,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병 속에는 형형색색의 액체들이 신비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병에는 밤하늘의 별빛이, 어떤 병에는 어린 시절의 웃음소리가, 또 어떤 병에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설렘이 갇혀 있는 듯했다. 그 모든 것이 진우의 메마른 감각을 자극했지만, 정작 그의 눈은 아무런 색도 읽어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나직하지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점의 주인은 늘 그랬듯이 반쯤 투명한 베일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형체는 명확하지 않았고, 그저 고요한 존재감만이 공간을 채웠다. 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꿈을 사러 온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은 기다림이었고,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제 꿈을 잃었습니다. 아니, 꿈을 꿀 줄 아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제 세상은 더 이상 아무런 색도, 소리도, 심지어 감각조차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그저 공허만이 저를 삼킬 뿐… 너무나 오래도록 어떠한 이미지도, 이야기도 제 밤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저의, 온전한 저의 꿈을.”

진우의 목소리는 희미한 울림을 타고 상점 안을 떠돌았다. 그의 간절함이 안개처럼 짙어지는 듯했다. 주인은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들어 진우에게 작고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여느 병들과 달리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비어 있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진우는 당황하여 물었다. 그는 최소한 아름다운 색이라도 기대했던 터였다.

“이것은 씨앗입니다, 손님. 메마른 땅에 심겨질 씨앗이지요.” 주인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은, 때로는 꿈 그 자체보다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아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병 안에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억의 속삭임’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잊고 살았던 색채와 소리의 첫 만남, 그 원초적인 감각의 씨앗입니다.”

진우는 병을 받아들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무게감. 그는 불신과 실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제가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심장을 믿으세요, 손님. 그리고 병을 밤마다 머리맡에 두십시오. 나머지는 당신의 영혼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장 찬란한 색은, 당신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진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상점을 나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을 걸으며 그는 손에 든 비어있는 유리병을 한없이 쓸모없게 여겼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결국 자신은 미련한 늙은이에 불과했던가. 값비싼 돈을 지불하고 그저 빈 병 하나를 받아든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인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심장을 믿으세요.’

그날 밤, 진우는 주인이 시킨 대로 빈 병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밤은 공허했다. 어떠한 이미지도, 어떠한 감각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얕은 잠이었다.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아련하고도 익숙한 꽃향기.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하지만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그 꽃의 향기였다. 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착각일까? 하지만 그의 방에는 꽃이 없었다. 그는 다시 잠이 들었고, 이번에는 귓가에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타닥, 타닥. 어린 시절 살던 다락방 지붕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였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잠결에 무언가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그의 심장이 희미하게 고동쳤다.

그 후로 매일 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미미한 감각들이었다. 혀끝에 닿는 달콤한 꿀의 맛,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 해질녘 하늘을 물들이던 파스텔톤 노을의 한 조각. 그 모든 감각들은 진우가 잊고 살았던 과거의 파편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조용한 속삭임처럼 그의 밤을 찾아와, 메마른 그의 영혼에 촉촉한 이슬처럼 스며들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진우는 눈을 감는 순간, 온전한 형태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아내와 함께 이름 모를 들판을 걷고 있었다. 아내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고, 그녀의 손을 잡은 진우의 손에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들판을 수놓은 야생화들의 다채로운 색깔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꿈속에서 그는 울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현실 같은 꿈에, 잃어버렸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진우는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꿈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살아 움직이는 증거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회색빛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벽에 걸린 낡은 그림자를 선명하게 비추었고, 먼지 쌓인 가구들의 나무색이 이전과는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는 서둘러 작업실로 향했다. 오랫동안 덮여 있던 캔버스 천을 걷어내고, 굳어버린 물감 튜브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그 떨림은 더 이상 절망의 떨림이 아니었다. 설렘과 희망의 떨림이었다. 파레트 위에 짜여진 물감의 색깔들이 그의 눈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빨강은 불꽃처럼 타올랐고, 파랑은 깊은 바다처럼 펼쳐졌으며, 노랑은 태양처럼 빛났다.

진우는 붓을 잡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밤마다 찾아왔던 그 감각의 씨앗들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 아내의 웃음소리가 그림의 배경이 되었고, 다락방 지붕 위의 빗소리가 그림의 리듬을 만들었다. 노을의 파스텔톤은 그의 화폭 위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 그의 붓질은 망설임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이어졌다. 색채가 넘실거렸고, 캔버스 위에는 잃어버렸던 그의 영혼이 다시금 생기를 되찾아갔다.

며칠 밤낮을 새워 그림을 완성한 진우는, 다시 ‘꿈을 파는 상점’을 찾았다. 상점 안은 여전히 몽환적인 안개로 가득했지만, 진우의 눈에는 그 안개 속에서조차 무지개빛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주인의 앞에 서서,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속에는 다채로운 꽃들이 만발한 들판 위로 무지개가 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젊은 시절의 진우와 아내가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림의 모든 색채와 빛은, 그의 심장에서 우러나온 온전한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주인은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베일 너머로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우는 그녀의 눈빛이 그림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꿈을요.” 진우는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심장이 그 씨앗을 잘 키워낸 것입니다, 손님. 가장 찬란한 색은, 언제나 당신 안에 있었습니다. 상점은 그저 잠시 길을 잃었던 당신의 마음에 작은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뿐입니다.”

진우는 이제 더 이상 어둡고 메마른 노인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아왔고, 그의 얼굴에는 잔잔하지만 확고한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상점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진우의 귀에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그려나갈 무한한 꿈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은, 그에게 다시 한번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선물해 주었다. 그가 잃었던 것이 꿈이 아니라, 꿈을 꿀 줄 아는 그의 심장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