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허름한 간판이 희미한 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 그 이름만큼이나 기묘하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 서은은 익숙한 듯 낯선 그 문 앞에 섰다. 낡은 나무 문은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고즈넉한 신음 소리를 내며 안으로 열렸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하고도 아련한 향기, 시간을 잊은 듯 켜켜이 쌓인 먼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고요함이 서은을 맞이했다.
상점 안은 여전히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벽면에는 투명한 유리병들이 즐비했고,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겨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병은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고, 어떤 병은 별을 담은 듯 반짝였다. 그것들이 바로 이 상점에서 파는 ‘꿈’이었다.
카운터 뒤편, 낡은 안경을 쓰고 두툼한 책을 읽던 몽상가는 서은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깊고도 투명했다. 마치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서은 씨. 어떤 꿈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몽상가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서은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저 상점 중앙에 서서 유리병들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그녀는 여기서 ‘행복했던 유년기의 추억’이라는 꿈을 샀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보냈던 여름날의 오후, 마당 가득 피어난 꽃들의 향기와 따스한 햇살, 그리고 할머니의 온기 가득한 손길. 잠든 순간, 그 꿈은 너무나 선명하게 그녀의 오감을 깨웠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할머니의 품에 안겨 세상 모든 평화를 느꼈다.
“꿈은… 아주 좋았습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죠.”
서은의 목소리는 희미한 떨림을 안고 있었다. 몽상가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할머니의 목소리, 손끝의 감촉, 마당 가득했던 꽃향기…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어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여전히 할머니의 온기를 느끼는 것 같았죠.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꿈이 현실로 돌아온 지금, 그녀의 마음은 과거의 행복과 현재의 공허함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 꿈은 저에게 다시 찾아왔지만, 현실은 그만큼 더 비워진 것 같습니다.”
몽상가는 안경 너머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꿈은 때로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잊고 지냈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지만,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부재한 현실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기도 하죠.”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눈을 떴을 때 제 방 천장을 보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꿈속의 행복이 현실의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들었어요. 마치 제 마음 한구석에 깊은 구덩이가 파인 것 같아요. 그 구덩이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몽상가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마치 나비를 가둔 듯 고운 비단 천이 깔려 있었다.
“서은 씨가 이곳에 오신 이유를 압니다. 그 구덩이를 메우기 위해서. 하지만 상점에서 파는 꿈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꺼내어 보여주거나, 존재할 수 있었던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일 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상자 안의 비단 천 위에서 작은 수정 구슬을 들어 올렸다. 구슬 안에는 옅은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구덩이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구덩이만큼 서은 씨에게 소중한 것이 존재했고, 그 소중한 것이 남긴 흔적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현재의 힘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서은은 몽상가의 손에 들린 수정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푸른빛이 마치 그녀의 마음속 공허함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멈출 수는 없어요. 그 꿈은 저에게 너무나 큰 행복을 주었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함께 주었습니다.”
몽상가는 수정 구슬을 다시 비단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서은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따뜻하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오늘 서은 씨에게 드릴 꿈은 없습니다. 대신, 하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서은 씨의 할머니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서은 씨가 슬픔에 잠겨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꿈이 주었던 행복을 발판 삼아 지금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살아내는 것일까요?”
서은은 몽상가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녀가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녀가 슬픔에 잠겨있다면, 할머니는 분명 속상해하실 것이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 따뜻한 사랑은, 그녀를 과거에 묶어두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제가 행복하길 바라셨을 거예요. 그 꿈이 주었던 행복의 감정을 잊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겠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그녀의 눈빛에 맺혔던 슬픔이 걷히고, 새로운 결심 같은 것이 피어나는 듯했다.
“맞습니다. 꿈은 때로 과거의 조각을 선물하지만, 그 조각을 어떻게 이어 붙여 현재를 장식할지는 온전히 서은 씨의 몫입니다. 그 구덩이는 슬픔의 자리가 아니라, 소중했던 기억이 새겨진 흔적입니다. 그 흔적을 보듬고, 그것이 당신에게 준 기쁨과 사랑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세요.”
몽상가는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듯 투명했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반짝임들이 공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현재의 꿈’입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지만, 서은 씨가 앞으로 만들어갈 모든 가능성을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이죠. 무료입니다. 다만, 이 병을 채울 책임은 오직 서은 씨에게 있습니다.”
서은은 조심스럽게 그 빈 병을 받아 들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중립적인 온도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제 이 병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이 주는 따뜻함으로 현재를 살아갈 용기를.
그녀는 몽상가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몽상가님.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상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밤하늘에는 별들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에 들린 빈 유리병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에게 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과거의 꿈이 준 아련한 슬픔을 넘어, 이제 그녀는 스스로 현재를 채워나갈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꿈을 파는 상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서은은 이제 꿈을 ‘사는’ 것을 넘어 꿈을 ‘만들어가는’ 길을 찾은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