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차가운 공기가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었다. 스튜디오 안은 낡은 마이크의 온기, 켜켜이 쌓인 LP판들의 숨결, 그리고 지혜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 위로 별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진 밤. 오늘도 그녀는 그 별빛 아래 수많은 이야기들을 불러 모으는 별밤지기였다.
“별밤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DJ 지혜입니다.”
차분하고도 따스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컵에 담긴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신 지혜는, 조금 전 도착한 한 통의 사연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활자들이 춤을 추며 아련한 향기를 피워 올렸다.
그 해 여름의 별똥별 언약
지혜 씨, 저는 서연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펜을 들었어요. 어쩌면 그 사람도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 년 전, 그러니까 제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죠. 그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밤하늘은 유난히 선명했습니다.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던 바닷가 마을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별똥별을 기다렸어요. 쏟아지는 별똥별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영원히 함께하자는, 말도 안 되는 어린아이 같은 약속을 했었죠. 그때 그가 제게 속삭였습니다. “이 별들이 다시 만날 날을 기억해 줄 거야.”
하지만 현실은 동화와 달랐어요. 각자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우리의 약속은 별똥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를 잊으려 애썼고, 정말 잊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주, 지혜 씨가 틀어주신 오래된 팝송 한 곡이 제 가슴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강렬하게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 곡은 우리가 처음 함께 들었던, 그리고 별똥별 아래에서 서로에게 불러주었던 노래였거든요.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를 다시 만나야 할까요? 저는 그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매일 밤 쓰고 있습니다. 이 밤에도 별똥별이 떨어질까요?
사연을 다 읽은 지혜는 잠시 침묵했다. 서연 씨의 글줄마다 배어 있는 짙은 그리움과 아련한 후회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가슴을 저미게 했다. 지혜의 시선은 스튜디오 창밖, 아득하게 펼쳐진 밤하늘을 향했다. 수많은 별들 사이, 어딘가에 서연 씨가, 그리고 그녀가 그리워하는 그가 같은 별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 씨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십 년 전의 약속. 어린 시절의 맹세는 때로는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씨앗처럼 뿌리내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하죠.”
지혜의 목소리에는 서연 씨의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야 할까… 정답은 없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약속과 그 사람을 당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추억이 당신을 지금의 당신으로 만들었고, 당신의 밤을 더 깊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죠.”
지혜는 손을 뻗어 한 LP판을 집어 들었다. 그 판에는 아주 오래된 재즈 앨범 커버가 그려져 있었다. 어두운 배경에 흐릿하게 웃고 있는 한 여인의 옆모습. 이 곡은 어쩌면 서연 씨에게, 그리고 어쩌면 지혜 자신에게도 필요한 위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우리가 그 별을 바라보는 순간은 매번 다릅니다. 서연 씨가 그 별똥별 언약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 약속이 아직 당신의 삶에서 빛나고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비록 그것이 재회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빛은 당신의 길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줄 거예요.”
지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빛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십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전, 별똥별 아래에서 만들어졌던 또 다른 약속이 숨 쉬고 있는 듯했다.
“서연 씨의 마음을 담아, 그리고 이 밤 이 순간, 같은 별똥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모든 ‘그 사람’들을 위해 이 곡을 띄워 드립니다.
‘Fly Me to the Moon’. 오래된 재즈 보컬리스트의 목소리로 듣는 밤의 고백입니다.”
나지막한 재즈 선율이 스튜디오를 채웠다. 지혜는 헤드폰을 벗고, 차가운 유리창에 기댔다. 도시의 불빛은 밤하늘의 별을 삼키려 들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별똥별 자국이 선명했다. 그것은 오래된 기억이었고,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오늘도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어주며 밤의 장막 속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