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마을의 아침은 언제나 같은 듯 다른 얼굴로 찾아왔다. 칠백삼십 번째 맞이하는 봄이었지만, 설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리움이 고여 있었다. 보랏빛 새벽이 가시고 맑은 햇살이 처마 밑으로 스며들 때, 오래된 창문 틈으로 기어이 스며든 봄바람은 희미한 꽃향기와 함께 낡은 일기장의 페이지를 살랑였다.
설아는 마당 한켠, 햇살이 가장 따스하게 머무는 툇마루에 앉아 익숙한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갓 피어난 자두꽃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찻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꽃잎은 옅은 물결을 일으키며 잔잔하게 흔들렸다.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누군가의 작은 손짓처럼. 설아는 그 작은 꽃잎을 바라보며 아득한 옛날, 지훈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들은 서로에게 ‘봄바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곤 했다. 언제나 불어와 소식을 전해주고, 또 조용히 사라지는 바람처럼.
몇 년이 흘렀는지,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지훈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날도 봄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설아는 봄이 올 때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소식을 싣고 오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이제는 그 기대조차 희미해져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잊혀진 약속의 그림자
설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 한편에 심어둔 오래된 벚나무가 가지마다 몽우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 어린 시절 지훈과 함께 묻어두었던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는 서로에게 쓴 편지와 작은 추억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매년 봄, 벚꽃이 만개할 때마다 설아는 그 상자를 파내어 지훈의 편지를 읽곤 했다. 이제는 더 이상 파내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 너무 그리워서, 더 이상 그 기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따스한 봄볕 아래, 마당을 정리하던 설아의 눈에 문득 낯선 것이 들어왔다. 벚나무 뿌리 쪽에 박혀 있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마치 며칠 전 내린 비와 바람에 의해 흙이 쓸려나가면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설아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래된 참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참새였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 투박하지만 섬세한 날개와 부리. 어릴 적 지훈이 직접 깎아 만들어 설아에게 선물했던 참새였다. “참새는 꼭 돌아온대. 설아, 네 옆으로 꼭 다시 돌아올 거야.”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설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자, 참새의 배 부분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ㅈㅎ♥ㅅㅇ’. 지훈과 설아의 이니셜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파인 홈에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그 홈을 긁어내자, 돌돌 말린 작은 종잇조각이 나왔다. 너무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설아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단 두 줄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훈의 필체였다.
‘그날의 맹세, 다시 지킬 수 있을까?’
‘정각, 푸른 호수 서쪽, 가장 큰 버드나무 아래서.’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설아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날의 맹세’. 그것은 그들이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날, 서로에게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그 맹세였다. 그리고 ‘푸른 호수 서쪽, 가장 큰 버드나무 아래’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둘만의 성역.
흔들리는 갈대밭
설아는 참새 조각과 종잇조각을 든 채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일까? 환영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잔인한 장난일까? 칠백삼십 번째의 봄바람은 그녀의 뺨을 스치며 차가운 현실을 일깨우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잊어야만 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분노, 슬픔,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번지는 희망.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지훈을 원망했다. 왜 아무 말 없이 사라졌는지, 왜 자신을 홀로 남겨두었는지.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 작은 종잇조각은, 그 모든 원망과 아픔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가 돌아온다면? 하지만 왜 이제서야? 왜 이런 방식으로?
설아의 시선은 마당 너머, 아득히 펼쳐진 산자락에 닿았다. 푸른 호수. 그곳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망설였다.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삶은 다시 송두리째 흔들릴 터였다. 다시 그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아니, 그를 다시 볼 용기가 있을까? 그는 그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허망한 기다림의 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마음 한켠에서는 강렬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지훈이 살아있다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으로도, 그녀는 다시 살아 숨 쉬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부는 바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은 채, 설아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햇살은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어느새 노을빛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때, 낡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을 어귀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미란이었다. 그녀는 설아의 오랜 친구이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설아, 아직도 거기 앉아 있어? 해가 지겠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미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활기찼지만, 설아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은 굳어졌다. “설아?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창백한데…”
설아는 미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에 쥐고 있던 참새 조각과 종잇조각을 내밀 뿐이었다. 미란은 그것들을 받아 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지훈의 존재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종이 위 희미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미란의 얼굴에 충격과 걱정이 교차했다.
“이… 이게 정말 지훈이 준 거야? 언제? 어떻게?” 미란의 목소리는 떨렸다.
“몰라… 봄바람이… 전해준 것 같아.” 설아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은 미란의 눈에 애원하듯 매달렸다. “내가… 내가 가야 할까?”
미란은 설아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아, 너는 정말 많이 아팠잖아.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하지만…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거야.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내가 함께 갈게.”
미란의 따뜻한 말에 설아의 눈가에도 뜨거운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두려움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이었지만, 오랫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심장에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칠백삼십 번의 봄을 기다려 온 그녀의 삶에,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던져준 봄바람의 속삭임이었다. 어쩌면 이 봄은, 단순한 계절의 시작이 아니라, 설아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아는 창밖의 푸른 호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떤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될 지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녀의 오랜 기다림은, 과연 허망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곡일까. 봄바람은 여전히 창문 틈으로 불어와, 알 수 없는 미래의 소식을 은은하게 전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