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침묵 속의 그림자
함박눈이 모든 소음을 삼키고 세상 위에 두꺼운 흰 이불을 덮었다. 오래된 한옥의 마루 끝에 앉은 하윤은 얼어붙을 듯한 공기 속에서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마치 차가운 거울에 김을 불듯 뿌옇게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창밖으로는 겹겹이 쌓인 눈꽃들이 달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하윤의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조금도 걷어내지 못했다.
‘벌써 며칠째야….’
하윤의 시선은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닿았다. 그 안에는 그녀의 할머니와 지우가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지우는 며칠 전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할머니는 그 옆을 지키며 밤새도록 지우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약초 달인 물도 소용이 없었다. 지우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았다. 하윤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불안감에 손톱을 꽉 깨물었다.
얼어붙은 기억의 조각
하윤은 주머니 속에서 낡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 손때 묻은 조각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열 살 되던 해 겨울, 작은 연못이 꽁꽁 얼어붙고 그 위로 첫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지우는 그때도 병약했다. 붉어진 볼에 뜨거운 열을 품고도, 지우는 눈밭을 헤치고 달려와 하윤의 손에 이 나무 조각을 쥐여주었었다.
“이거… 우리 비밀이야. 절대로 잊으면 안 돼.”
그때 지우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윤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날, 하윤은 지우에게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우를 지켜주겠다고. 병약한 동생을 향한 언니의 맹세였다. 그리고 그 약속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윤의 삶을 꿰뚫는 단단한 실타래가 되었다. 지우를 지키는 것, 그것이 하윤의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존재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 뒤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할머니만이 알고 있는, 이 오래된 집의 낡은 벽장 속에 봉인된 것 같은 비밀. 지우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할머니는 점점 더 그 비밀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는 잠결에 알 수 없는 옛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금고… 열쇠… 산골짜기…”. 단편적인 말들이 하윤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오래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지우와의 약속은 단순한 자매의 맹세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뒤에 가려진 거대한 그림자가 하윤을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그림자
새벽녘, 희미하게 날이 밝아올 무렵, 하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안방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지우의 옆에서 옅은 잠이 들어 있었고, 지우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윤은 할머니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피곤에 지친 눈빛이었지만, 하윤을 보자마자 그 눈빛에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하윤아… 네가 여기에 왜….”
“지우가 걱정돼서요. 그리고… 할머니가 자꾸 혼잣말을 하시길래.”
할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슨 혼잣말을 했다고 그래. 노망든 늙은이 말은 귀담아듣지 마.” 할머니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하윤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지우의 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대로는… 지우가 위험해요.”
“안 돼!”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는 작고 쇠약한 몸에서 나올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절대로 안 돼. 병원에 가면… 그 사람들이 지우를 찾아낼 거야. 아직은 안 돼… 지우는 아직….”
하윤은 할머니의 말에서 숨겨진 의미를 읽었다. ‘그 사람들’. 상현의 그림자가 이 깊은 산골까지 드리워져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상현은 지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니, 지우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할머니가 언급했던 ‘금고’와 ‘열쇠’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오래전, 할머니의 오래된 친구에게서 건네받았다는 낡은 상자. 그 상자 속에 있던 것은 지우의 출생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그 비밀이 상현의 탐욕을 부추기고 있었다.
새로운 약속의 무게
바로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눈 밟는 소리. 서걱거리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설마… 이렇게 일찍? 하윤은 재빨리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눈 쌓인 오솔길 저편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할머니의 눈빛은 불안과 동시에 깊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윤아…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할머니…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저 사람들이….”
“아니, 지금 말해야 해. 지우를 정말 지키고 싶다면… 이 할미가 알려줄 것이 있어. 이 집에 숨겨진… 진짜 약속의 열쇠.” 할머니는 힘겹게 손을 뻗어 하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그 약속은… 사실… 너와 지우, 그리고 이 가문을 지키기 위한… 피로 맺어진 맹세였단다. 그 열쇠는….”
밖에서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윽고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윤은 할머니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창밖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손에는 서늘하게 빛나는 금속 물질이 들려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하윤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지우를 지키겠다는 약속, 할머니가 숨겨온 비밀, 그리고 다가오는 위협. 이 모든 것이 차가운 눈꽃처럼 하윤의 어깨 위에 쌓여만 갔다. 제724화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