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155화

어렴풋한 멜로디의 덫

지우는 오래된 재봉틀 위에 놓인 낡은 오르골을 응시했다. 먼지 앉은 뚜껑 위에는 희미하게 깎인 꽃무늬가 있었고, 그 아래 작은 서랍은 닫혀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들은 고대의 기록 보관소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을 쫓아 헤맸지만, 단서는 마치 신기루처럼 잡힐 듯 말 듯 사라지곤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아지트, 그곳에서 발견한 이 오르골은 왠지 모르게 지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수는 지우가 평소답지 않게 한 물건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옆에 섰다. “그거, 예전부터 여기 있던 건데. 한번도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요. 고장 났거나, 아니면 키가 없거나 둘 중 하나겠죠.”

지우는 대답 없이 손을 뻗어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톱니바퀴들이 녹슨 채 드러났다. 키는 보이지 않았다. 지우는 오르골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낡았지만 손에 익숙한 듯한 이상한 감각이 손바닥을 감쌌다.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이끌림.

흐릿한 그림자

갑자기 오르골의 태엽 감는 부분이 희미하게 빛났다. 지우는 놀라서 오르골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이내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겨우 진정했다. 현수는 눈을 비볐다. “방금… 빛이 났나요? 제가 잘못 본 건가?”

지우는 다시 오르골을 만졌다. 태엽 부분의 미세한 틈 사이로 작은 스위치가 보였다. 손톱으로 스위치를 누르자, 거짓말처럼 오르골이 덜컥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맑고 청아하지만 깊은 슬픔을 담은 선율이었다.

그 멜로디가 지우의 귓가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 파편처럼 조각난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따스한 햇살 아래, 작은 아이가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이는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멜로디와 함께 울렸다. 향긋한 꽃내음, 그리고 어딘가 아련한 아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면서도 동시에 흐릿했다. 누구였지? 저 아이는? 저 손은 누구의 것인가?

“지우 씨! 괜찮아요?” 현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지우를 현실로 끌어냈다. 지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오르골을 움켜쥐고 있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잃어버린 이름

오르골 멜로디는 이내 끊어졌다. 지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수를 바라봤다. “현수… 방금… 제가 뭘 본 것 같아요. 아이… 작은 아이… 그리고 이 멜로디…”

현수는 지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기억의 파편이 너무 갑자기 튀어나오면 더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아니요.”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번엔 달랐어요. 생생했어. 그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온기, 그 웃음소리… 너무나 그리워.”

지우는 다시 오르골을 들여다봤다. 서랍이 닫혀 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하고 열어보려 했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오르골 멜로디가 멈추자마자 서랍이 잠긴 것이다. 마치 멜로디가 열쇠였던 것처럼.

“이 서랍 안에 뭔가 있을 거예요.” 지우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의 과거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현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봤다. 매번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찾을 때마다 지우는 기쁨과 동시에 깊은 고통을 느꼈다. 어렴풋이 보이는 과거의 그림자가 과연 행복한 기억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일까.

지우는 오르골을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봤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의 불빛들이 저 멀리 반짝였다. 저 빛들 속 어딘가에,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오르골의 멜로디는 그 조각들을 다시 맞춰줄 유일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잊힌 아이, 잊힌 손길. 그 아련한 이름 없는 존재가 지우의 가슴속을 아프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