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이 마루 깊숙이 스며드는 늦은 오후였다. 이하나 여사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요한 마당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녀의 작은 정원은 생명의 환희로 물들었다. 가지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피어나고, 담장 아래로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졌다. 지난겨울의 앙상한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연둣빛 새순들이 돋아나며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은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하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햇수로 스무 해가 넘도록, 그녀의 곁을 떠난 외동딸 은수에 대한 그리움은 옅어지기는커녕, 봄바람이 실어오는 꽃향기처럼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딸이 가장 좋아했던 계절, 이 봄이 올 때마다 하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동감 속에서 딸의 부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모든 소리가 은수의 목소리로 변해 그녀의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엄마, 봄이 왔어요. 우리 꽃 보러 갈까요?’ 스무 살의 은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세상의 모든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꺾여 버렸다.
그때였다. 낡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낯선 그림자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하나는 눈을 떴다. 낯선 젊은 여인이었다. 고풍스러운 한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등에 멘 작은 배낭과 손에 든 낡은 서류 봉투가 그녀의 방문이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게 했다.
“실례합니다. 이하나 여사님 댁이 맞으신지요?”
나긋나긋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렸다.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젊은 여인의 얼굴에서, 잊고 살았던 어떤 인연의 파편이 언뜻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시죠?” 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낯선 이의 방문은 하나에게 언제나 불안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소식은 대개 그녀의 고요한 일상을 흔들어 놓는 법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김지민이라고 합니다. 사실, 여사님께 꼭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지민은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긴장감과 함께 깊은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하나는 지민을 앉으라고 권하지도, 더 묻지도 않고 그저 응시했다. 봄바람이 다시 한번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벚꽃 잎 한 장이 바람에 실려와 하나의 찻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오랜 침묵을 깨는 소리
지민은 하나의 표정을 살폈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슬픔이 배어 있는 그 얼굴에서, 지민은 자신이 짊어진 책임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는 등에 멘 배낭에서 정갈한 천으로 싸인 낡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푸는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제가 감히 여사님의 오랜 평화를 깨드리는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만… 이 소식은 반드시 여사님께 직접 전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민은 상자 안에서 빛바랜 편지 한 통과 작은 은색 목걸이를 꺼냈다. 목걸이의 펜던트에는 작게 ‘은’이라는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목걸이를 본 순간, 하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스무 살 생일에 그녀가 은수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딸은 그 목걸이를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목걸이의 존재는 하나의 굳건한 평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손이 저절로 뻗어 나갔지만, 허공에서 멈췄다.
“어떻게… 어떻게 이걸 당신이…?” 하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차갑게 굳어있던 덩어리가 마치 해동이라도 되는 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함께 잊고 지냈던 희미한 희망의 빛줄기가 아련하게 스며들었다.
지민은 조용히 편지를 하나의 앞에 내밀었다. 편지 봉투는 낡고 구겨졌지만, 익숙한 필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봉투의 발신인은 분명 ‘이은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딸의 이름이었다. 죽은 딸이 보낸 편지라니.
“이 편지는… 제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입니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 이 편지와 목걸이를 저에게 주시면서… 반드시 이하나 여사님을 찾아가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지민의 어머니? 그럼 지민은 누구란 말인가. 스무 해 전,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딸이… 살아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살아있었다면 왜 찾아오지 않았지? 그리고 지금은… 임종 직전이라니.
하나는 지민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젊은 여인의 눈매, 오뚝한 코, 살짝 다문 입술… 왠지 모르게 낯익다 생각했던 그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딸 은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은수의 얼굴이, 이 젊은 여인의 얼굴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폭풍처럼 몰려오는 기억
“말도 안 돼…” 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쥐었다. 종이의 질감, 글씨체의 익숙함이 거짓말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스무 해 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슬픔과 의문, 그리고 희미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의 어머니 이름은 이은수입니다.”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사고로 인해 기억을 일부 잃으셨고, 이름도 바꾼 채 홀로 지내시다가 저를 낳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셨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여사님을 그리워하셨습니다.”
하나의 귀에 지민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은수가 살아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결국… 홀로 외롭게 떠났다는 말인가. 하나는 그 모든 사실을 믿을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지난 스무 해의 시간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보낸 그 모든 밤들이, 허상이었다는 말인가?
하나는 편지를 천천히 뜯었다. 봉투가 찢어지는 소리가 마치 그녀의 심장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지지 가득 메운 딸의 글씨를 보는 순간, 하나의 시야는 눈물로 흐려졌다. 첫 문장은 ‘사랑하는 엄마께’로 시작하고 있었다.
엄마, 이 편지가 엄마의 손에 닿을 때쯤이면 저는 아마 세상에 없을 거예요. 너무나도 죄송해요. 엄마를 두고 먼저 떠나야 했던 것도, 그리고 엄마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도. 스무 해 전 그날의 사고로 저는 모든 기억을 잃고 헤매었어요.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낯선 도시의 병원에 누워 있었고, 제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어요. 그저 목에 걸린 이 목걸이 하나만이 제가 ‘은’이라는 이름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죠.
이후의 삶은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지민이라는 소중한 딸이 생겼어요. 지민이는 엄마의 삶을 살게 해 준 유일한 희망이었죠. 기억을 되찾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었어요. 너무나도 기뻤지만, 동시에 엄마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저의 부재로 인해 엄마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차마 염치없이 나타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지민이를 보면서,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리며 후회했어요. 왜 그토록 이기적이었을까. 엄마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지민이를 통해 저의 흔적을 엄마께 전하고 싶어요. 지민이는 저의 전부이고, 저의 분신이에요. 지민이를 보시면… 저를 조금이라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요?
부디, 저의 이 마지막 소식을 봄바람에 실어 엄마께 전해지기를 바라며… 부디 엄마,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리고… 지민이를 만나주세요. 사랑하는 저의 엄마.
편지는 거기서 끝이 났다. 하나의 손에서 편지가 미끄러져 마루에 떨어졌다. 흐느낌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딸의 따뜻하고 정갈한 글씨체는 마치 은수가 지금 그녀의 곁에서 속삭이는 듯 생생했다. 딸이 살아있었다니. 딸이 자신을 그리워했다니. 그리고… 이 아이가, 자신의 손녀라니.
하나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 속에 담긴 깊은 슬픔과 함께, 할머니를 찾으려 애썼을 외로운 삶의 흔적이 역력했다. 봄바람이 다시 한번 마당을 휘감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은 더 이상 슬픔을 싣고 오지 않았다. 이제 그 바람은 하나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희망의 속삭임을 전하고 있었다.
하나는 힘없이 앉아 있는 지민에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쭈글쭈글한 그녀의 손이, 지민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 순간, 지민은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하나의 품에 안겼다. 스무 해의 세월을 뛰어넘어, 피로 이어진 두 여인의 뜨거운 온기가 차가웠던 봄날의 마루 위를 가득 채웠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상실의 끝에 피어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어서 와라… 내 손녀딸.” 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눈물 속에는 비로소 오랜 고통을 씻어내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긴 지민의 작은 어깨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