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닭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하던 김해리 마을의 아침을 가르자, 이내 연둣빛 아침 햇살이 동쪽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넘어 마을 어귀에 살포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김덕수 이장님의 하루는 그 빛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낡은 작업복 바지에 투박한 면 티셔츠 차림으로 마당을 나선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당 한켠의 오래된 감나무 아래, 꼬리를 붕붕 흔들며 그를 반기는 누렁이 ‘복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덕수 이장님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좋은 날이여, 복실아. 할 일도 많고, 웃을 일도 많겄지?”
따뜻한 아메리카노 대신 구수한 보리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덕수 이장님은 읍내에서 사온 낡은 라디오를 틀었다. 정겹게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락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제 저녁 읍사무소에서 받아온 서류들을 꼼꼼히 살폈다. 마을회관 환경 개선 사업 예산 보고서, 그리고 경로당 겨울 난방비 지원 신청서.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마을 어르신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훈훈해지는 듯했다.
갓 지은 밥에 아내가 끓여준 시래깃국으로 든든히 아침을 먹고 나선 시각, 아홉 시가 채 안 되어 이장님은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회관 앞마당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어르신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며 회관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안에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장님! 이장님 좀 오시랑께요! 큰일 났어야!”
박순자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덕수 이장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평소 잔병치레 하나 없이 꼿꼿하시던 할머니가 이렇게 다급하게 부르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급히 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회관 중앙 마루에 놓인 플라스틱 대야에는 시커먼 빗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천장 한가운데, 낡은 합판 위로 커다란 물자국이 선명했다.
“아이고, 할머니! 이게 대체…!”
“어젯밤에 비가 좀 왔잖여. 아침에 보니까 이렇게 축축하이 물이 새고 있는 거라. 겨울 다가오는데 이러다 천장 무너지는 거 아닝가 몰러. 으스스하이 추워서 영 앉아있을 수도 없어야.”
순자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다른 어르신 몇 분도 곁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덕수 이장님은 서둘러 천장 구석구석을 살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오래되어 여기저기 금이 가고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였다. 며칠 전부터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경로당은 김해리 마을 어르신들의 유일한 사랑방이자 겨울나기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냉골 같은 방에서 덜덜 떨며 지낼 어르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덕수 이장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쾌한 이장님’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장 수리 업체를 부르면 되겠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마을 예산은 이미 겨울 난방비와 농로 보수 작업 등으로 빠듯했다.
그는 순자 할머니를 안심시키고 일단 급한 대로 플라스틱 통 몇 개를 가져다 놓은 뒤, 읍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담당 직원은 난감한 목소리였다. “이장님, 저희도 예산이 참… 올해는 이미 책정된 사업 외에는 지원이 어렵습니다. 긴급 보수는 어렵고, 내년 예산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검토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내년? 내년 겨울까지 어르신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따스했던 아침 햇살이 거짓말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장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평소 같으면 긍정의 힘으로 어떻게든 길을 찾았을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막막함이 앞섰다. ‘이럴 때 내가 유쾌한들 무슨 소용이여…’
오후가 되자, 덕수 이장님은 결국 청년회장 김영호를 호출했다. 영호는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목공소를 운영하며 마을 대소사에 힘을 보태는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영호는 경로당 천장을 꼼꼼히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장님, 이건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지붕 전체를 손봐야 할 정도네요. 슬레이트도 오래돼서 위험하고… 읍내 업체 부르면 견적 꽤 나올 겁니다. 최소 5백은 들걸요?”
5백만 원. 마을에겐 큰돈이었다. 덕수 이장님은 무거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을까, 영호야. 당장 겨울이 다가오는데, 어르신들이 저 차가운 곳에서 지내실 걸 생각하면 내 잠이 안 와.”
영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음… 이장님, 일단 급한 대로 저희가 직접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완전한 수리는 아니더라도, 어르신들 겨울 나실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요.”
“우리들이? 뭘 어떻게…?”
“마을회관 뒷창고에 혹시 쓸만한 방수포 같은 거 있을까요? 아니면, 몇 년 전에 창고 짓고 남은 샌드위치 판넬 조각이라도요. 그리고… 제가 아는 철물점 사장님이 있는데, 자재를 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을 분들의 힘을 모으는 거죠.”
영호의 말에 덕수 이장님의 얼굴에 서서히 희망의 빛이 찾아들었다. 그래, 언제나 그래왔듯이 김해리 마을 사람들은 함께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즉시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처음에는 걱정과 한숨이 먼저였지만, 이장님의 간절한 눈빛과 영호의 굳건한 태도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장님은 마을 방송으로 경로당 지붕 수리 자원봉사를 공지했다. 다음 날 오후, 거짓말처럼 마을회관 앞마당은 분주해졌다. 김영호는 몇몇 청년들과 함께 읍내 철물점에서 방수 시트와 몇몇 자재를 싸게 구해왔고, 동네 남자들은 낡은 사다리와 연장을 들고 모여들었다. 아낙네들은 점심때 먹을 새참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호야, 혹시 지붕 올라갈 사람 더 있냐? 조심해야 하는디…” 덕수 이장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제일 젊고 튼튼하니 제가 할게요! 조심 또 조심할 테니 염려 마세요, 이장님!” 영호는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잡았다. 그의 뒤를 이어 서넛의 젊은 청년들이 지붕으로 향했다. 다들 서툴렀지만, 진지한 얼굴로 영호의 지시에 따라 낡은 슬레이트 위에 방수 시트를 덮고 틈새를 메우기 시작했다.
덕수 이장님은 아래에서 자재를 나르고, 꼼꼼하게 일꾼들의 안전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유쾌한 미소가 번졌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순자 할머니는 감동에 젖은 눈으로 작업을 지켜보며 몇 번이고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점심때가 되자, 아낙네들이 부쳐온 따뜻한 배추전과 막걸리가 마당에 가득 차려졌다. 다들 땀 흘리며 먹는 새참 맛은 꿀맛이었다.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 작업 끝에, 경로당 지붕은 눈에 띄게 깔끔해졌다. 완전한 수리는 아니었지만, 당분간은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특히 가장 심했던 누수 지점은 임시 방수포로 단단히 덮어놓았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노을 아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보람과 만족감이 가득했다.
모두가 떠난 뒤, 덕수 이장님은 홀로 경로당 마루에 앉았다. 천장에는 더 이상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듯했다. 그는 오늘 하루의 모든 순간을 되짚어보았다. 아침의 근심, 절망감, 그리고 이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얻은 이 소중한 결과까지. 그의 유쾌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해리 마을 사람들을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문득, 경로당 문턱을 넘는 서늘한 바람이 그의 볼을 스쳤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덕수 이장님의 마음은 오히려 따뜻했다. 그의 눈앞에는 차가운 겨울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훈훈한 김해리 마을의 불빛들이 아른거렸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내일도 좋은 날이여. 분명 좋은 날일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