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낡은 커튼을 흔들었다. 지우는 익숙한 손길로 무릎 위에 놓인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어루만졌다. 짙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갈색 가죽 표지는 이미 여러 번의 수선으로 기워져 있었지만, 그 덕에 더 단단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수없이 넘겨온 페이지들, 그 안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희로애락은 이제 지우 자신의 이야기처럼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다. 738번째 이야기, 오늘 할머니는 또 어떤 비밀을 들려주실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살짝 울어 있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이 글을 쓰던 순간 분명히 울고 계셨을 것이다. 날짜는 1952년 늦가을. 지우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할머니의 20대 초반으로 기록된 그 시절의 한 조각이, 잊힌 슬픔을 품고 지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선택
할머니의 고르지 못한 글씨체가 한숨처럼 이어졌다.
“오늘, 나는 내 생애 가장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영훈을 떠나보내는 것. 그것만이 그를 살리는 길이라 믿었기에, 내 심장을 찢어 발기는 고통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절망과 체념은 평생 나의 가슴을 후벼 파는 비수가 될 것이다. 차가운 강바람이 불던 강변에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가 그의 따스한 온기를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잔인한 예감은 왜 그리도 선명했을까.”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하고, 때로는 엄했지만, 슬픔을 내색하는 법이 없던 할머니의 마음속에 이런 심연이 존재했다니. 지우는 페이지에 흐려진 할머니의 눈물 자국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할머니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처럼.
“그는 나를 떠나면 살 수 있었다. 아비규환 같던 그 시절, 나는 나를 구하려던 그를 외면하는 것으로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영훈을 잊어야 했다. 아니, 잊은 척해야 했다. 매일 밤 강물 소리만 들어도, 바람 소리만 들어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그를 떠나보낸 그 선택이 옳았을까? 평생 단 한 순간도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살아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괜찮았노라 말해주고 싶다. 나의 선택이, 나의 사랑이 너를 살렸노라고,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잊은 적 없다고.”
할머니의 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잉크가 닳아 글자가 희미해졌지만, 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언제나 가슴에 작은 밤나무 조각을 품고 다녔다. 외딴 고아원 앞에서 주웠다던, 작고 희망 없는 조각.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줄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부디 그 조각을 알아봐 주기를… 그는 아마 ‘해송정(海松亭)’이라는 작은 주막 근처에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면, 그곳에 가서 그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약속…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
밤나무 조각과 해송정
일기장을 덮자, 방 안은 할머니의 묵직한 슬픔으로 가득 찬 듯했다. 지우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할머니가 평생 숨겨온 비밀, 그 아픈 사랑의 조각이 이제야 지우의 손에 닿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이따금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던 모습, 겨울밤 홀로 잠 못 이루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든 순간들이 영훈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이었을까.
지우는 일기장을 품에 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리고 울음이 잦아들자, 마음속에 굳은 결심이 피어났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영훈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 일기장 속에는 그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은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난 뒤라도 누군가 그 아픈 사연을 알아주고, 영훈의 흔적을 찾아주기를 바랐던 것 아닐까.
밤나무 조각, 그리고 해송정. 지우는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의 희미한 기억 속 단서들이, 7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우에게 새로운 임무를 안겨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도 지우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할머니의 잊힌 사랑을 찾아 나서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는 기꺼이 그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이제, 과거를 넘어 현재의 지우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우는 작은 지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해송정, 그곳이 어디쯤이었을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