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동네 이장님의 하루 – 제237화

오월의 햇살은 온 마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연두색 새싹들은 푸른 잎으로 짙어지고,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는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가 실려 왔다. 동네 이장님, 김봉수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부터 마을 회관 앞마당을 비질하고 있었다. 투박한 손으로 빗자루를 든 그의 얼굴에는 연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지난밤 이슬이 맺혔던 마당은 그의 부지런한 손길 아래 금세 윤이 났다.

“이장님! 또 일찍 나오셨네!”

동네 어귀에서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복실이네 순영 아줌마가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품에는 갓 뜯은 싱싱한 쑥 한 다발이 안겨 있었다.

“허허, 순영 씨도 부지런하구먼. 벌써 쑥을 다 뜯었어? 쑥국 끓일 생각인가?”

“그럼요! 이맘때 아니면 언제 먹겠어요? 그나저나 이장님은 언제 쉬시려고 이리도 몸을 혹사시키신대요? 허리가 아파서 호호거릴 날이 올라!”

순영 아줌마의 뼈 있는 농담에도 봉수 이장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넉넉하고 정겨웠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유쾌한 이장님’이라 부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늘 앞장섰고, 언제나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때로 마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오늘의 봉수 이장님은 특히 기분이 좋았다. 내일이면 마을 공동 텃밭에서 첫 모내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청년회원들이 며칠 전부터 땅을 고르고 물길을 다듬느라 고생이 많았고, 어르신들은 옆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날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온 마을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언제 봐도 뿌듯했다.

“이장님, 점심은 제가 끓인 쑥국 한 그릇 대접할게요! 따끈하게 몸 좀 지지세요.”

순영 아줌마의 말에 봉수 이장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쑥국 한 그릇이 벌써부터 위장을 따뜻하게 채우는 듯했다. 비질을 마친 봉수 이장님은 마을 회관 문을 열고 들어가 오늘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모내기 준비물 점검, 어제 신청 들어온 농기구 수리 요청 확인, 그리고… 읍내에서 돌아올 막내손자 성민이에게 줄 용돈 준비까지. 그의 하루는 언제나 빼곡했지만, 그 모든 일이 그에게는 살아있는 기쁨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마을 회관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봉수 이장님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청년회장 민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장님! 큰일 났습니다! 복자 할머니 댁이… 복자 할머니가 며칠째 안 보이신대요!”

민구의 목소리에는 당황과 걱정이 가득했다. 복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 중 한 분이었다. 자녀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혼자 사셨지만, 워낙 정정하고 손수 밭일을 다 하시는 분이라 모두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째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다는 말에 봉수 이장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며칠이나? 어제 내가 읍내 나가는 길에 마당에 서 계신 거 봤는데….”

봉수 이장님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읍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복자 할머니 댁 앞을 지나며 얼핏 마당에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워낙 어두워 자세히 보지는 못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마을 회관 밖으로 나섰다.

“민구야, 우선 너는 젊은 사람들이랑 같이 할머니 댁 주변 좀 살펴봐. 나는 직접 가봐야겠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복자 할머니 댁은 마을 회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낡은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감나무 아래 잡초들이 무성했다. 평소 같으면 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마당이 오늘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대청마루에는 어제 걷어두었을 법한 빨래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고, 댓돌 위에는 고무신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할머니! 복자 할머니! 계세요?”

봉수 이장님은 조심스럽게 마루로 올라서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쓰러져 계신 건 아닐까? 봉수 이장님은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창문이 닫혀 있어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 희미하게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방문 구석,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봉수 이장님은 조용히 다가갔다. 이불 속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복자 할머니! 괜찮으세요? 이장 김봉수입니다. 문 열어보세요, 저 왔어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올리자,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다. 복자 할머니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기력이 쇠한 듯 힘없는 얼굴, 평소 당당했던 할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봉수 이장님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장님… 미안해유… 괜히 걱정만 끼쳐 드리고….”

봉수 이장님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그는 가슴이 아려왔다. 혼자 얼마나 쓸쓸하고 힘드셨을까. 곁에 아무도 없이 며칠 밤낮을 홀로 견뎌야 했던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할머니. 제가 죄송하죠. 제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세요? 병원 가셔야죠!”

봉수 이장님은 할머니의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확인했다. 다행히 열은 없는 듯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젓는 척하다가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다.

“괜찮여… 괜찮은디… 다리가… 며칠 전에 밭에서 넘어졌는디, 영 시원찮네.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서… 부끄럽고….”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히 몸이 아픈 노인이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홀로 숨어들어 고통을 감내하려 했던 한 평생의 자존심과 외로움이 뒤섞인 깊은 슬픔이었다.

봉수 이장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쾌한 그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꽉 잡고 온기를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할머니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봉수 이장님의 손등에 떨어져 차가운 파문을 일으켰다.

“할머니,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우리가 남이에요? 이웃사촌이 괜히 이웃사촌인가요? 이럴 때 서로 돕고 사는 거죠!”

그는 얼른 전화를 꺼내 읍내 보건소에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민구에게도 연락하여 몇몇 청년들을 할머니 댁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봉수 이장님은 다시 할머니 곁에 앉아 나직이 말했다.

“할머니, 괜찮아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제가 할머니 다리 아픈 거 고쳐드리고, 집도 깨끗하게 치워드릴게요. 맛있는 밥도 해 드릴 거고. 할머니는 그냥 편안하게 계시면 돼요.”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할머니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복자 할머니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그녀는 봉수 이장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걱정스러움과 함께, 변함없는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읍내에서 보건소 직원들이 도착했다. 젊은 남자 직원과 간호사 한 명이 할머니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심한 골절은 아니었고, 타박상과 근육통이 심한 상태였다. 보건소 직원들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고 필요한 약을 건네주며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민구와 청년회원들도 속속 도착했다.

“이장님!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민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봉수 이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큰일은 아니야. 하지만 할머니가 혼자서 며칠을 고생하셨어. 민구야, 너희 젊은 친구들이 할머니 댁 주변 좀 깨끗하게 정리해 드려라.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들께는 할머니 식사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고.”

“네, 이장님! 걱정 마세요! 저희가 싹 다 치울게요!”

청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며칠간 쌓였던 설거지를 하고, 마당의 잡초를 뽑고,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그들의 손길 아래 복자 할머니 댁은 금세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순영 아줌마와 몇몇 동네 아주머니들은 따뜻한 쑥국과 반찬을 들고 찾아와 할머니를 위로했다. 할머니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봉수 이장님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뿌듯함과 함께,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 하나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웃의 작은 어려움에도 귀 기울이고,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마을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그의 유쾌한 하루는 때론 예기치 않은 슬픔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정으로 언제나 다시금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주홍빛 노을이 마을을 감쌌다. 복자 할머니 댁 마루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방 안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수 이장님은 흙 묻은 신발을 털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가벼웠다. 내일 모내기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넉넉하고 유쾌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도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마을의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