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은 낡은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펼치고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책상 위로 쏟아지며, 먼지 앉은 공기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할머니의 필체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그녀는 이 낡은 책 속에서 할머니의 젊음과 사랑, 슬픔과 용기를 함께 경험했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모든 질문에 답이 찾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인가.”
미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몇 페이지는 유독 닳고 해져 있었다. 할머니가 가장 아끼고, 또 가장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퀴퀴한 종이 냄새는 미정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더 깊이 끌어당겼다.
마지막 페이지, 아니, 마지막 장의 안쪽 표지였다. 보통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곳이지만, 할머니는 그곳에 작은 주머니를 덧대어 박아두었다. 바느질 솜씨는 서툴렀지만, 그만큼 절실함이 느껴졌다. 미정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사진 한 장과 말라버린 작은 꽃잎 하나가 들어있었다.
사진은 흑백이었다. 한 젊은 여인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앳되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미정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아기… 아기는 너무나 작고 순수했다. 그런데 아기의 팔뚝에 희미하게 보이는 점. 미정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그 점은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도 있는 가족의 특징적인 점이었다.
할머니는… 이 아이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할머니의 일기장 어디에도 이 여인과 아기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미정은 다시 앞장들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단어라도 놓쳤을까 봐.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듯이.
다시 마지막 장으로 돌아왔다. 사진이 있던 주머니 바로 옆에, 작은 글씨로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른 페이지들처럼 자세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숨겨진 메시지처럼 단 몇 줄만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 그리고 나의 마지막 소원.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부디, 너의 삶이 행복했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너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이제라도 전하고 싶구나.’
미정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 할머니는 평생 한 명의 자식, 즉 미정의 아버지 외에는 다른 자식이 없다고 말했다. 온 가족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진 속 여인은 누구이며, 이 아기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문구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할머니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아이를 잠시 돌보았던 것일까?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일기장을 통해 할머니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큰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말라붙은 꽃잎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어떤 꽃이었을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사진 속 여인의 아련한 눈빛과 아기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미정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족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깊고 아픈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미정은 사진과 짧은 글귀를 번갈아 보며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그녀에게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문을 열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 문 너머에는 어떤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그녀의 가족 역사를 뒤흔들지도 모르는 진실이… 그녀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아기가 혹시… 하는 생각에 미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