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39화

김현수는 낡은 휴대전화 액정에서 깜빡이는 ‘송 여사’라는 이름을 응시했다. 밤 11시 37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시각, 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난 20여 년간, 수없이 많은 밤을 이런 식으로 지새웠다. 한 통의 전화, 한 장의 사진, 스쳐 가는 이름 하나에 매달려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송 여사는 그가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맨, 이유진의 흔적에 대해 너무나도 명확하게 말했다.

“유진 씨가 자주 오던 갤러리예요. 당신이 찾는 그 유진 씨가 맞을 겁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말 속에는 세월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현수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마침내. 이토록 기나긴 여정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닳고 닳은 유진의 옛 사진을 꺼냈다. 빛바랜 교복 차림의 여고생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에 그의 세상이 있었고, 그 미소를 잃은 후 그의 세상은 잿빛으로 변했다.

다음 날 새벽, 현수는 해 뜨기 전부터 차를 몰아 강릉으로 향했다. 도시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진과의 기억으로 가득 찼다. 빗속에서 함께 뛰었던 골목길, 노을 지는 언덕에서 나누었던 첫 키스, 낡은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두고 속삭였던 미래의 꿈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될 줄은.

오전 10시, 그는 송 여사가 알려준 ‘고요의 여운’이라는 작은 갤러리 앞에 섰다. 해변가 작은 마을의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파스텔톤 건물의 아담한 갤러리였다.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조명 아래 걸린 그림들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유진의 차분한 성품과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백합 향이 코끝을 스쳤다. 현수는 숨을 들이쉬었다. 송 여사는 카운터 뒤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흰 머리에 안경을 쓴, 인자한 인상의 노부인이었다. 현수가 다가가자, 송 여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깊었다.

“오셨군요, 김현수 씨.”

그녀의 목소리는 전화로 들었던 것보다 더 차분하고 나직했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송 여사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갤러리 안쪽으로 안내했다. “앉으시죠. 먼 길 오셨을 텐데.”

현수는 가죽 소파에 앉았지만, 긴장감 때문에 온몸이 뻣뻣했다. 그녀는 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그의 마음속 불안도 피어올랐다. 유진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마음속 유진은 영원히 열아홉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이 갤러리는 특별한 손님들만 찾아오는 곳이에요.” 송 여사가 나지막이 말을 시작했다. “유진 씨도 그중 한 분이셨죠. 처음에는 그저 그림을 보러 오셨어요. 늘 이 방의 그림들 앞에서 한참을 서 계시곤 했죠.”

송 여사는 그를 이끌어 갤러리 한쪽 벽에 걸린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어둡고 고요한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 빛을 뿜어내는 작은 등대가 그려져 있었다. 파도에 부서지는 물거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머금은 듯했다. 그림 속 등대는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굳건한 희망을 담고 있는 듯했다.

“이 그림은 익명의 화가가 그린 ‘희망의 등대’ 연작 중 하나예요. 유진 씨는 이 그림들을 정말 사랑했어요. 이 그림들에서 본인의 삶을 보셨다고 했죠. 늘 멀리서 빛을 찾아 헤매는 자신 같다고.”

현수의 눈길이 그림에 고정되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먹먹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유진이 이 그림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자신을 떠나보낸 그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희망을 찾고 있었을까?

“유진 씨는 여기서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었어요. ‘한유진’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죠.”

“한… 유진…?” 현수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맴돌았다. 유진이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모든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했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을 테니까.

“어느 날 유진 씨가 이 그림을 보며 그러더군요. ‘이 등대가 서 있는 곳은 사실 제가 가장 사랑했던 곳이에요’라고요. 그리고 저에게 이걸 맡겼어요. 이 등대의 의미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이 온다면, 그때 전해달라고.”

송 여사는 조심스럽게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현수에게 그 종이를 건넸다. 현수는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종이를 펼쳤다. 종이 위에는 연필로 섬세하게 그려진 등대의 스케치가 있었다. 송 여사가 가리킨 그림 속 등대와 똑같았다. 그리고 스케치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두 줄의 시가 적혀 있었다.

“수많은 파도 속에 홀로 선 등대여
언젠가 너의 빛이 닿을 곳에, 나의 바다가 있으리.”

현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시는… 유진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의 눈앞에서 세상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는 20여 년간 찾아 헤맨 유진의 흔적을, 이토록 담담하고도 애틋한 시 한 편에서 발견한 것이다. 스케치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지명 하나가 적혀 있었다. 강원도 고성군의 한 작은 포구, 그곳의 등대였다.

“그 등대가 있는 곳으로 가면, 유진 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현수는 목이 메어 간신히 물었다.

송 여사는 현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나고 못 만나고는 하늘의 뜻이겠죠.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평생을 찾아 헤맨 답의 조각을 찾을 수는 있을 겁니다. 유진 씨는 가끔 그곳에 갔어요. 홀로, 아주 조용히.”

현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희망의 등대. 그곳에 유진이 있었다. 그는 종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낡은 종이가 구겨질세라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갤러리 밖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방향을 찾은 나침반처럼 확고했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외치고 있었다. 유진. 이유진. 내가 너에게로 간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고성군 등대 포구의 주소를 입력했다. 화면에 표시된 도착 예정 시간은 1시간 반. 그 1시간 반이 현수에게는 영원과 같았다. 그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동해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 어딘가에 그가 찾아 헤맨 첫사랑이, 이제는 ‘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등대 아래에서 기다리는 것이 영원한 재회일지, 아니면 또 다른 이별의 시작일지, 현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향해 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 든 스케치는, 마지막 희망이자, 새로운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현수는 액셀을 밟았다. 눈앞에 펼쳐진 길은 이제 목적지가 명확했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 터져 나오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진,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