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화실의 잔상
오랜 수소문 끝에 지훈이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낡은 건물 숲 사이에 숨겨진 오래된 화실이었다. 유리창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고, 낡은 나무 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서연이 언젠가 ‘내 작은 우주’라 불렀던 그 꿈의 공간이 이렇게 잊혀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낡은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지훈을 맞았다. 햇빛 한 줄기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서연의 열정으로 가득 찼을 이 공간은 이제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침묵하고 있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캔버스들, 굳어버린 물감 튜브, 그리고 뒹구는 붓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과거의 흔적이었다. 지훈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찾았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수많은 먼지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빛을 발하는 듯한, 익숙한 느낌의 상자였다.
시간이 멈춘 스케치북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스케치북 몇 권과 펜이 담겨 있었다. 손끝으로 스케치북 표지를 쓸어보니, 서연이 즐겨 쓰던 짙은 푸른색 커버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어쩌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서연의 흔적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온몸을 감쌌다.
첫 번째 스케치북을 펼쳤다. 초창기 그녀의 습작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서툰 인체 드로잉, 풍경화, 그리고 그의 얼굴을 그리다 만 페이지까지. 지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앳된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때의 순수했던 감정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모든 페이지에서 풋풋한 시절의 서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숨을 고르고 다음 스케치북을 열었다. 이전 것들보다 조금 더 최근의 그림들인 듯했다. 화풍은 한층 성숙해졌고, 색채는 더욱 깊어진 느낌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은 더욱 섬세해졌고, 풍경은 생동감이 넘쳤다. 그녀가 꿈을 향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분명 이 화실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뜻밖의 얼굴
페이지를 넘기던 지훈의 손이 멈췄다.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다른 그림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러나 완벽하게 마무리된 한 장의 그림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린아이의 초상화였다. 맑고 커다란 눈망울, 살짝 벌어진 입술, 통통한 볼.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세상 모든 빛을 담은 듯 밝고 따스했다. 그림 속 아이의 머리카락과 얼굴선은 분명 서연의 섬세한 붓 터치였지만, 낯선 존재감에 지훈은 숨을 멈췄다.
아이의 그림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날짜. 그리고 그 옆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하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윤’.
지훈의 손에서 스케치북이 떨어졌다. 낡은 나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화실에 메아리쳤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이 최근의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연은, 과연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첫사랑의 흔적 끝에서, 지훈은 뜻밖의 얼굴과 마주했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그의 가슴을 꿰뚫는 듯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 속에서, 지훈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첫사랑 서연은,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