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 – 제190화

밤은 깊고 창밖으로는 지루한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수아는 낡은 창틀에 기댄 채, 김이 서린 유리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차가운 유리창이 그녀의 뺨에 닿아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지는 열과의 사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어떤 작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지훈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낯선 인연으로 시작된 그 밤의 만남이 이토록 깊은 사랑이 될 줄은, 그때의 수아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수많은 역경과 오해, 그리고 헤어짐의 순간들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쌓아올린 시간들이 지금, 그녀의 손 안에서 모래처럼 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수아.”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훈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하고 다정했지만, 수아는 그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에는 애써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슬픔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왜 그래, 또 아파?” 지훈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그녀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이 수아에게는 고통이었다.

“아니, 괜찮아.” 수아는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그냥…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아.”

지훈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수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소리야, 수아. 이제야 겨우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어.”

“아니, 제자리로 돌아온 건 없어.”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한, 너는 늘 위험할 거야. 내 존재 자체가 너에게 그림자야.”

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지훈의 심장을 찔렀다. “이젠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난 너와 함께라면 어떤 그림자든 헤쳐 나갈 수 있어. 너 없이는 그 어떤 빛도 의미 없어.”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이제 모든 것을 끝내자, 지훈.”

이별을 고하는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지훈은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 칼날이 스스로를 베는 고통을 읽어냈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손등 위로 그의 따뜻한 눈물이 떨어졌다.

“거짓말하지 마, 수아.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너를 포기할 수 없어. 우리 함께 여기까지 온 시간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어?”

“그 시간들이… 모두 너에게 상처가 될 거야.” 수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나는 너의 미래를 망치고 싶지 않아. 너는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내 행복은 너인데, 어떻게 너 없이 행복할 수 있어!” 지훈의 목소리가 절규하듯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수아는 그의 얼굴을 피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해, 지훈. 미안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빗줄기가 창밖에서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 폭풍우를 대변하는 듯했다.

“수아, 가지 마… 제발!” 지훈이 손을 뻗었지만, 수아는 이미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애타는 부름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문밖으로 사라졌고, 이내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지훈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방 안에는 빗소리와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밤 기차에서 시작된 낯선 인연은, 지금 이토록 잔인한 이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수아의 눈빛 속에는, 그가 모르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그녀가 자신을 떠나보내는 이유가, 단순히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님을.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 속으로, 수아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지훈을 위한 선택이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은 그녀의 심장이 여전히 그를 향해 울부짖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별이라는 잔인한 칼날을 든 채, 그녀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리고 그 칼날은 과연, 그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까.

지훈은 텅 빈 방 안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만을 응시했다. 이별은 진실이 아니라고, 그의 모든 감각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설 터였다. 그 어떤 어둠 속이라도, 다시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서. 이 인연이 닿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