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은 익숙한 어둠 속에서 숨을 쉬었다. 현상액 냄새, 먼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표정이 새겨진 필름 냄새가 뒤섞인, 자신만의 세계였다. ‘추억 사진관’의 간판은 여전히 비스듬히 걸려 있었지만, 그 빛은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희미했다. 렌즈 너머로 보아왔던 무수한 삶의 조각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낡은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유독 오래된 현상실 한구석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때 묻은 작업대 아래, 좀처럼 손대지 않던 나무 상자들을 꺼내 먼지를 털어냈다.
“이런 것이 아직도 있었던가.”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민준의 손에 낡은 나무 앨범 한 권이 들렸다. 거미줄처럼 얽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앨범이었다. 표지는 바래고 모서리는 닳아 너덜거렸다. 앨범을 펼치자,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결혼식 사진, 갓난아기의 백일 사진, 졸업 사진… 모두 한때는 가장 행복했거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담았을 삶의 증거들이었다. 앨범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사진들은 더욱 오래되고, 필름의 상태 또한 좋지 못했는지 희미한 윤곽만 남아있는 것들이 많았다.
문득, 한 장의 사진에 민준의 시선이 멈췄다. 젊은 여인이 수줍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전신 사진이었다. 머리에는 작은 화관을 쓰고, 손에는 이름 모를 들꽃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인의 눈매와 입술에서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 잊었던 꿈속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듯한 기시감. 사진 속 여인의 옷차림은 적어도 6, 7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일이었다.
민준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앨범에서 꺼내 들었다. 손가락 끝으로 사진의 질감을 느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인화지. 사진 뒷면에는 잉크가 번진 듯 희미하게 쓰인 글씨가 있었다. ‘1967년, 순옥.’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마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불꽃 같기도 하고, 혹은 거대한 나무의 가지 같기도 한 문양이었다. 그는 사진을 들어 창가로 가져갔다. 희미한 햇빛 아래 사진 속 여인의 미소가 더욱 또렷해졌다.
“순옥… 순옥이라…”
입술로 이름을 되뇌자, 잊고 지냈던 파편들이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오래전, 아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이 사진관의 초기 시절, 아버지가 유난히 아끼던 단골손님 중 한 분이 있었다고 했다. 늘 밝고 생기 넘쳤던 여인.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 그 여인의 이름이… 어렴풋이 ‘순옥’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어린 시절의 막연한 기억일 뿐이었는데,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듯했다.
더욱 민준을 사로잡은 것은 여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낯선 익숙함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이 눈매, 이 코, 그리고 살짝 오므린 듯한 입술. 그는 머릿속 필름을 감듯이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사진관에 들렀던 한 젊은 여인의 얼굴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네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는, ‘소희’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달라며 사진관을 찾았었다. 소희 씨의 할머니는 이 동네 토박이였고, 오래전부터 이 사진관의 단골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민준은 소희 씨 할머니의 이름을 듣고도, 정확한 앨범을 찾을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 씨의 할머니… 그리고 이 사진 속의 ‘순옥’.
민준은 사진 속 여인과 소희 씨의 얼굴을 번갈아 상상했다. 젊은 시절의 소희 씨 할머니와 지금의 소희 씨. 그 둘 사이에 느껴지는 놀라운 공통점. 특히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 속의 ‘순옥’은 혹시 소희 씨의 할머니였을까?
하지만 소희 씨 할머니의 이름은 ‘박순자’였다. ‘순옥’이 아니었다. 민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다를 수도 있나?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인가? 그러나 직감은 이 사진이 소희 씨와 무언가 연결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사진 뒷면의 문양을 보았다. 불꽃 같기도 하고 나무 가지 같기도 한 그 그림. 문득, 얼마 전 소희 씨가 꽃집 명함에 그려 넣었던 로고가 떠올랐다.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위로 뻗어 나가는 듯한 형상. 그것은 이 사진 뒷면의 문양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소희 씨는 그 로고가 할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어떤 상징물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있던 어떤 진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민준의 심장이 오랜만에 잊었던 박동을 시작했다. 사진관을 지키며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담아왔지만, 이렇게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사진은 오랜만이었다. 이 사진 한 장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왜 소희 씨의 할머니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까? 그리고 사진 뒷면의 그 문양은 무슨 의미일까?
오랜 침묵 속에 잠겨 있던 사진관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예감이 스며들었다. 민준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고, 낡은 전화기 다이얼에 손을 올렸다. 지금 당장, 소희 씨에게 연락해야 할 것만 같았다.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뛴,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다시 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실타래의 끝에는 과연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