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199화

사라진 색을 찾아서

지우의 붓은 오래도록 마른 채였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여백. 한때는 온 세상의 색을 담아내겠다던 열정은 여동생 민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회색빛 재로 변해버렸다. 햇빛이 창문을 넘어 작업실 바닥에 네모난 그림자를 그릴 때마다, 지우는 그 그림자가 자신을 옥죄는 상실감의 테두리처럼 느껴졌다.

먼지를 털어내려 민아의 작은 상자를 열었을 때였다. 낡은 스케치북과 빛바랜 색연필들 사이에서 지우의 손에 잡힌 것은 다름 아닌 작은 필름 롤 하나. 손가락만 한 그것은 차갑게 굳은 납처럼 무거웠다. 분명 민아의 것이었다. 항상 별난 풍경이나 사물을 찍는 것을 좋아했던 민아. 하지만 이 필름은 어째서 현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을까.

수년 만에 다시 발을 들인 ‘오래된 사진관’은 변함이 없었다. 삐걱이는 나무문, 오래된 필름 통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 그리고 햇빛이 부유하는 먼지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유리 진열장까지. 모든 것이 민아와 함께 찾았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사진관 주인 최 씨 아저씨는 지우를 보자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묵묵히 모든 것을 지켜본 듯한 깊이가 서려 있었다.

“민아가 남긴 필름이에요. 혹시 현상 가능할까요?”

지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갈라져 나왔다. 최 씨 아저씨는 말없이 필름 롤을 받아 들고는 작업실 안으로 사라졌다. 탕, 탕, 탕. 오래된 현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지우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민아의 사진이 나올 거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어쩌면 그저 하늘이나 길가의 작은 풀꽃이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민아 특유의 엉뚱한 표정을 담은 셀카일 수도.

시간이 흐르고, 최 씨 아저씨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인화된 사진들을 들고 나왔다. 하나, 둘, 셋… 예상대로 민아가 좋아하던 강아지, 지우의 작업실 풍경, 햇살 아래 반짝이는 호수. 익숙한 풍경들이 지우의 눈을 스쳤다. 하지만 마지막 몇 장은 달랐다. 사진관의 배경 천을 뒤로하고 찍은 민아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장난기 넘치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진지하고 애틋한 눈빛.

그리고 마지막 사진. 그것은 지우의 손을 멈추게 했다. 사진 속 민아는 두 손으로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니, 다시 그려줘.’ 그리고 그 아래에는, 민아가 상상했던 가장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으로 가득 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지우와 민아가 함께 꿈꾸었던, 온갖 보석 같은 빛깔로 반짝이는 환상의 숲.

지우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이 터진 듯했다. 민아는 떠나기 전, 지우에게 남겨진 모든 색을 다시 찾아달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 오래된 사진관이, 민아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년 동안 이 필름을 기다려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우는 숨이 막혔다.

사진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케치북 속 민아의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지우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붓을 잡고 싶어졌다. 캔버스 위에 다시 색을 칠하고 싶어졌다. 상실감으로 가득했던 가슴속에 민아가 남긴 작은 씨앗이,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듯 파르르 떨렸다.

낡은 나무문을 밀고 사진관을 나선 지우의 발걸음은 더 이상 그림자처럼 무겁지 않았다. 햇살 아래, 지우의 그림자는 처음으로 분명한 윤곽을 그리는 듯했다. 이제 그녀는, 민아가 남긴 색들을 찾아 다시 세상을 그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영감이, 가장 소중한 메시지와 함께 기적처럼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