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773화

시간의 잔해가 흩뿌려진 우주의 외곽, 아득한 고요 속에 잠든 행성 ‘베스타 7’의 대기는 시아의 발아래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수많은 시간축을 가로지르며 헤매던 그녀의 여정은 이곳, 잊힌 문명의 폐허에 도달해 있었다.
거대한 사암 구조물들이 사막의 모래폭풍에 깎여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 그 자체가 조각한 유령 도시 같았다. 이곳의 중력은 지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그 덕분에 시아의 발걸음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기억의 무게는 여전히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침묵의 전당

시아가 찾던 곳은 폐허의 중심에 자리한 ‘기억의 전당’이었다. 고대 문명의 지식과 기록이 봉인된 곳이라 전해지는 전설 속의 장소. 수백 년 전의 정보 조각들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전당의 입구는 거대한 균열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안쪽은 영원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휴대용 광원장치를 꺼내 들었다. 텅 빈 공간에 빛이 닿자, 무수히 많은 수정 기둥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터 크리스탈이었다. 한때 찬란했던 문명의 모든 순간이 이 유리 같은 매개체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죽은 듯이.

시아는 전당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원형 플랫폼이 있었다. 플랫폼 위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움푹 파인 홈이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어렴풋한 기시감. 과거의 어느 순간, 그녀가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시간 에너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증명하는 시간 여행자의 표식이 그 홈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깨어나는 과거

쉬이이이잉—
낮고 웅장한 진동음이 전당을 가득 채웠다. 플랫폼의 바닥에서부터 푸른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그 빛은 무수히 많은 데이터 크리스탈 기둥으로 번져 나갔다. 마치 잠들어 있던 별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것 같았다.
크리스탈 기둥들 사이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고대의 언어, 알 수 없는 상징들, 그리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무언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혼란스럽게 펼쳐지던 중,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전당의 중앙, 시아의 눈앞에 거대한 홀로그램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는 듯한 얼굴. 긴 은회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왼쪽 뺨에는 작고 섬세한 나비 문신이 선명했다.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기억나지 않는다. 전혀. 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찢어질 듯한 아픔이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번져 나갔다. 이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슬프고…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 홀로그램 여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시아….”
그녀의 이름이 불렸다. 나직하고 애틋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시아의 잃어버린 기억 속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는 듯했다.
“오랜만이야… 나의 별.”
‘나의 별.’ 그 단어에 시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왜 나를 알고, 왜 나에게 이런 감정을 선사하는가?

경고와 새로운 길

홀로그램 속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멀리 있는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시간이… 없어요. 당신이 이 데이터를 활성화한 순간, 그들도 알아챘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 메시지는… 당신을 위한 마지막 조각입니다. 당신의 기억, 그리고 나의 존재… 모두 얽혀 있어요. ‘엘리시움의 꿈’… 그곳에서 모든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조심해요. 시간이 뒤틀린 자들은… 당신을 노리고 있어.”
‘시간이 뒤틀린 자들.’ 시아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기억을 잃게 만든 자들, 그녀를 이 미궁 속으로 밀어 넣은 그림자들.

전당의 어둠 속에서 삐익—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멀리서 거대한 금속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혹은 비행선의 엔진 소리처럼.
홀로그램 여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시아를 지탱해 줄 단 하나의 빛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찾아야 해요… 시아. 그녀의 시간은… 당신의 심장입니다.”
지직—
여인의 홀로그램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전당을 채웠던 푸른빛도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시아는 제단 위에서 주저앉았다. 손바닥을 떼자 홈은 다시 텅 비어버렸다. 그녀의 손끝에는 아직 홀로그램 여인의 온기… 아니, 그녀의 이름이 불렸을 때의 전율이 남아있는 듯했다.
폐허의 고요는 다시 찾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종류의 고요였다. 더 이상 잊힌 문명의 침묵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위협의 전조, 그리고 새로운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심장의 고동 소리였다.
시아는 자신의 손등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시아에게 기억 너머의 강력한 이끌림을 남겼다. ‘엘리시움의 꿈’. 그곳이 어디든, 그녀는 찾아가야 했다. 자신의 심장을 찾기 위해.

멀리서 들려오던 금속음이 더욱 가까워졌다. 이제는 착륙하는 비행선의 굉음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시아의 존재를 눈치채고 다가오고 있었다.
시아는 제단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비록 기억을 잃었지만, 이제는 뚜렷한 목표 의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의 별…” 그녀는 알 수 없는 여인이 남긴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