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고요하던 산골 마을에 첫 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여느 집들보다 한발 앞서 활기찬 기운을 뿜어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마을 이장님의 집이었다. 오늘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장님 댁 마당에서는 쩌렁쩌렁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리에 찬 녹색 작업복 앞치마가 햇살에 반짝였고, 얼굴에는 아침 이슬처럼 상쾌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콧노래는 마치 밭고랑을 헤치고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주문 같았다.
“아이고, 이장님! 아침부터 흥이 넘치시네요!”
골목을 지나던 박 씨 아저씨가 경운기를 멈추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장님은 허리에 찬 호미를 잠시 내려놓고 허리를 펴더니,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박 씨! 아침은 거르지 말고 든든히 먹어야지! 이 좋은 아침에 기운이 없으면 쓰나!”
늘 그랬다. 이장님의 하루는 늘 긍정과 활력으로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 자체가 활력소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예감이 이장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제저녁, 오랫동안 마을 어귀에 홀로 살아오신 김순분 할머니 댁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 오지랖 넓은 이웃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는 원래 일찍 주무시는 편이셨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스쳤다.
조용한 발걸음, 깊은 마음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이장님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평소 같으면 마을 회관에 들러 오늘 할 일을 점검하거나, 밭일을 나가는 마을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을 테지만, 오늘은 곧장 김순분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용하고, 얼굴의 웃음기는 살짝 옅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할머니께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하는 걱정이 이장님의 마음을 짓눌렀다.
할머니 댁 대문 앞,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당은 잘 가꾸어져 있었지만, 어쩐지 인기척이 없었다. 마루 위에는 마른 고추가 소반에 담겨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희미한 TV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장님은 조심스럽게 마루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계세요? 이장 왔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안에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김순분 할머니의 파리한 얼굴이 드러났다. 늘 정정하시던 할머니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구, 이장 양반. 뭔 일로 여기까지….”
“할머니, 어제 저녁에 불이 너무 일찍 꺼져 있어서 걱정돼서 와 봤습니다. 혹시 몸이라도 불편하신가 해서요.”
이장님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았다. 손은 축 처져 힘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장님의 따뜻한 손길에 왈칵 눈물을 쏟으셨다.
“아이고, 이장 양반… 내가 이젠 늙어서… 뭘 해도 힘이 드네. 어제는 우물 펌프가 고장 나서 물도 못 길어 올리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에구, 이제 내가 짐만 되는 거 같아서….”
할머니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잠겼다. 펌프 고장이라는 사소한 문제였지만, 홀로 된 할머니에게는 그 작은 일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이장님은 할머니를 부드럽게 안아드렸다.
이장님의 마법, 그리고 마을의 온정
“할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저희의 큰 기둥이신데요. 펌프요? 걱정 마세요! 제가 후딱 고쳐드리겠습니다!”
이장님은 씩씩하게 말했지만, 사실 펌프 수리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녹슨 부품을 교체해야 했고, 깊은 우물 속까지 손을 넣어 작업해야 했다. 하지만 이장님의 얼굴에는 어느새 다시 유쾌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는 할머니께 따뜻한 차 한 잔을 타 드리고는, 곧바로 마을 청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호야, 승현아! 지금 당장 김순분 할머니 댁으로 와라! 펌프가 고장 났는데, 너희 힘이 필요하다!”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건장한 청년 두어 명이 연장을 들고 할머니 댁으로 달려왔다. 마을의 궂은일에는 늘 앞장서는 젊은이들이었다. 이장님은 능숙하게 진두지휘하며 펌프 수리를 시작했다. 녹슨 쇠붙이를 빼내고, 새 부품을 끼워 넣는 작업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이장님과 청년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할머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시원한 우물물이 콸콸 쏟아질 겁니다! 이장님의 특급 수리반이 떴으니 걱정 마세요!”
이장님은 작업 중에도 할머니께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아주머니 몇 분은 부랴부랴 따뜻한 죽과 반찬을 챙겨 할머니 댁으로 모여들었다. 할머니의 마루는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였고, 웃음소리와 정겨운 대화가 오가는 사랑방으로 변했다.
“아이구, 다들 이게 무슨 고생이여. 나는 그저….”
할머니는 죄송함과 고마움에 다시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장님은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할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할머니, 이게 바로 우리 마을의 정 아니겠습니까. 서로 도우며 사는 게 진짜 사는 재미지요! 할머니는 그저 오래오래 건강하게 저희 곁에 계셔주시는 게 가장 큰 도움이자 선물입니다!”
이장님의 진심 어린 말에 할머니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셨다. 파리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눈빛에는 다시 따뜻한 온기가 서렸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펌프에서 시원한 우물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솟구치는 순간,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노을 아래, 깊어지는 감회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평화로운 저녁 기운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이장님과 청년들이 떠나간 뒤에도 한동안 마루에 앉아 우물가에서 솟아나는 물줄기를 바라보셨다. 그 물줄기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이장님의 굳건한 정성이 응축된 사랑의 물줄기였다.
이장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친 몸을 이끌고 읍내로 향하는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 진 마을 풍경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지만, 오늘따라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누군가의 작고 사소한 어려움이, 이장님과 마을 사람들의 손길이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는 모습. 그 속에서 할머니의 웃음을 되찾아 드린 하루. 그것이 이장님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이자, 그의 유쾌함이 지닌 진정한 힘이었다.
집에 도착한 이장님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충만했다. 내일 아침에도 이장님은 또다시 유쾌한 콧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이 마을의 모든 작은 숨결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는 등대처럼 서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