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북풍이 창을 흔들었다. 오래된 산중 연구소,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천문대 건물은 흰 눈보라에 잠겨 마치 거대한 유령선처럼 보였다. 이 지훈은 망원경 대신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그날의 기억처럼 거세고 맹렬했다. 하얗게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그는 780개의 밤낮을 홀로 견뎌왔다.
손안에 쥐어진 오래된 은제 회중시계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뚜껑을 열자 바래진 사진 한 장이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린 서연이었다. 맑은 눈동자는 겨울 햇살처럼 빛났고, 그 옆에 서 있는 어린 자신은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날, 겨울 눈꽃이 처음으로 대지를 덮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핏빛 서약, 백색 기억
십 년 전, 지훈은 열여덟이었다. 이곳, 그의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연구소에서 그는 서연과 함께 자랐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벗이자, 그의 세계였다. 그해 겨울, 유난히 굵은 눈발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연구를 마치고 숨을 거두셨다. 차가운 연구실 바닥에 쓰러진 할아버지의 손에는 깨진 유리관과 알 수 없는 기호가 새겨진 오래된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지훈아… 이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해…”
할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은 피 섞인 한숨과 함께 흩어졌고, 지훈은 피에 젖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창밖으로는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꽃은 순식간에 연구소 주변을 온통 뒤덮었다. 그때 지훈은 어린 서연의 손을 잡고 맹세했다. 이 비밀을, 이 약속을, 평생 지키겠다고. 그때는 그 약속이 자신들의 운명을 이렇게까지 얽어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재회와 위협의 그림자
현재. 회중시계를 닫으며 지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십 년간 숨겨왔던 진실,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 그리고 ‘그것’을 노리는 세력들. 어젯밤, 최 민준에게서 온 긴급 보고가 그의 마음을 다시 한번 무겁게 짓눌렀다. ‘그들’이 서연의 위치를 알아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김 현수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움직이면 항상 피바람이 불었죠. 서연 씨에게 접근하려는 게 확실합니다.”
민준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로도 절박함이 묻어났다. 지훈은 창밖의 눈보라를 응시했다. 서연은 서울 도심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비밀이나 그 약속의 무게를 전혀 알지 못했다. 지훈은 그녀가 안전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십 년간 그녀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며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 평화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
현수는 오래전부터 할아버지의 연구 결과에 집착해왔다. 그는 그것이 세상을 뒤흔들 힘을 가졌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 지훈은 그 힘이 올바르지 않은 손에 들어가면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의 기로
지훈의 내면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지금까지는 서연을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모르게 보호하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수가 직접 나섰다면, 그의 보호막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할까? 그 위험한 진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어야 할까? 그것은 그녀의 평범한 삶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가 될 터였다.
천문대 안쪽, 먼지가 쌓인 연구대 위에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지던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할아버지의 연구 노트와 함께, 낡은 오르골이 들어 있었다. 멜로디는 어릴 적 서연과 함께 들었던 자장가였다. 그는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어릴 적 서연의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지훈 오빠, 이 음악이 정말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켜주어야 했다. 어떻게든.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녀의 웃음이 더 이상 슬픔으로 물들지 않도록.
갑자기, 천문대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바람만큼이나 긴박했다.
“지훈아! 현수 일당이… 바로 이 산으로 진입하고 있어! 서연 씨가 서울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그녀가 사라졌다? 현수가 먼저 손을 썼단 말인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십 년간의 침묵이 무너지고, 약속의 서약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절망감과 동시에,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오르골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회중시계 속의 어린 서연의 미소가, 그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민준아, 준비해.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어.”
지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십 년간 잊고 지냈던 전투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약속은 이제 더 이상 조용한 맹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결단의 밤
천문대 밖,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 시야를 가렸다. 지훈은 낡은 코트를 여미고 문을 나섰다. 발아래 쌓인 눈은 그의 결심처럼 단단했다.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다. 서연을 찾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그는 어둠 속으로, 폭풍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멀리서 희미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현수가 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대결. 지훈은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손은 주먹을 쥐었고, 그의 눈은 결연한 빛을 띠었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