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훈은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택배 상자를 응시했다. 밤늦은 시각, 창밖으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주소도 발신인도 없는 익명의 소포. 이런 식의 ‘단서’는 지훈의 209화에 달하는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심장이 거칠게 울렸다. 그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투명한 비닐에 싸인 한 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서툰 연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래전, 서연이 그에게 처음으로 그려주었던 그 그림이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언덕과 그 위로 떠오른 초승달. 그림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다시 만날 그날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지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그림은 세상에 둘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서연이 떠나기 전날 밤, 그에게 몰래 건네주며 수줍게 웃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림과 함께 작은 쪽지가 있었다. 단 한 단어. ‘기억’.
지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미했던 서연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웃음소리, 손의 감촉, 작은 습관들까지.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기억 속 서연은 단 한 순간도 흐려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애틋해졌다. 이 그림을 보내온 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기억’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한 도발일까, 아니면 서연이 자신에게 보내는 암호일까.
그는 택배 상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발신지는 익명이었지만, 우체국 소인은 희미하게 ‘새벽동’이라고 찍혀 있었다. 새벽동. 오래전 서연과 함께 자주 거닐던 작은 골목과 낡은 건물들이 모여 있던 동네였다. 그곳에는 지금은 사라진 작은 미술 학원도 있었다. 서연이 잠시 그림을 배우러 다녔던 곳.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그림을 그렸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그림이었다.
비가 잦아들었지만, 지훈의 마음속 폭풍은 더욱 거세졌다. 그는 코트와 차 키를 챙겨들었다. 이 밤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이제 다시 멈출 수 없었다. 낡은 사무실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새벽동으로 향하는 길,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친 도로는 마치 그의 마음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 길의 끝에, 잃어버린 첫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잔인한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예감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차를 몰아 새벽동의 낡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십 년 넘게 변치 않은 듯한 허름한 건물들이 어둠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옛 미술 학원 자리로 향했다. 그곳은 이제 빈 점포로 남아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지훈은 차에서 내려 건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심장이 귀청이 찢어질 듯 뛰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곳에 서연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손끝이 저릿했다.
녹슨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는 문득 멈칫했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건물 안에서. 누군가 안에 있는 것일까? 서연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조작하는 익명의 그림자일까? 그는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는 희미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듯 낯선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연이 즐겨 듣던, 오래된 피아노 곡이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 오랜 기다림의 끝이 드디어 다가오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할까.
지훈은 주먹을 꽉 쥐고 문을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 속에, 한 여인의 뒷모습이 서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부드러운 선율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선은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훈은 그녀의 이름을 겨우 삼켰다. 수많은 밤을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그의 첫사랑, 서연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아는 것처럼, 혹은 이미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연주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잃어버린 첫사랑이, 마침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재회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동시에 폭풍처럼 격렬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