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779화

차가운 별빛 아래, 숙명의 그림자

밤은 깊고, 세상은 온통 눈이었다. 별자리 관측소의 낡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마치 억겁의 시간을 넘어와 유리창에 부딪히는 잊힌 속삭임 같았다. 은서의 손은 차가운 난간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지만, 그녀의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결심의 불꽃만큼은 식지 않았다. 오늘은 그날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잊힌 듯했던 약속, 아니, 운명의 굴레가 다시금 그녀를 붙드는 날.

아애라,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이 그녀의 귓가에 아련히 맴돌았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아애라의 삶은, 은서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었다. 그 저주를 끊어낼 유일한 방법은, 가장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가 ‘별의 눈물’이 내리는 밤,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운명을 바꾸는 것. 그 예언의 시간이 바로 오늘이었다. 이 차가운 눈꽃이 세상을 뒤덮는 밤.

창밖을 응시하던 은서의 시선이 문득 바닥에 놓인 낡은 목각 조각에 닿았다. 서툰 솜씨로 조각된 작은 눈꽃 문양. 십수 년 전,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세상이 마냥 아름답기만 했던 어린 시절, 처음으로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그와 함께 만들었던 것이었다. “은서야,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이 눈꽃처럼 굳건히 버텨.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 이겨낼 수 있어. 약속해.” 그의 따뜻한 손길과 맹세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금 그녀가 마주한 운명 앞에서는 한낱 허망한 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맹세, 폭풍 속으로

밤하늘을 찢는 듯한 속도로 지훈은 차를 몰아붙였다. 눈보라가 앞을 가렸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찢어질 듯한 불안감이 그의 온몸을 잠식했다. 은서가, 그녀가 무언가 엄청난 결심을 하고 있다는 직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녀의 가족이 대대로 겪어온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훈은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는 핸들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낡은 대시보드 위에는 작은 목각 눈꽃 조각이 놓여 있었다. 은서와 함께 만든, 그 겨울날의 맹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할 거야.’ 그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친 서로에게 기댄 채, 눈밭 위에서 나눈 영혼의 서약이었다. 그는 은서가 늘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사랑만큼이나 깊은 외로움과 고통을 보아왔기에, 지훈은 그녀가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할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은서야, 기다려. 제발… 내가 갈게.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이 맹렬한 눈은 마치 시간 자체를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그들이 함께 약속했던 모든 순간들을, 그리고 지금 그녀가 하려는 선택을.

운명의 갈림길에서

은서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자리 관측소의 중앙에는 고대 의식이 치러지던 듯한 낡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였지만, 그 위에 놓인 촛불은 흔들림 없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제단 위로 다가가 미리 준비해둔, 아애라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인형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내 품속에서 오래된 가족의 비기를 꺼냈다. 빛바랜 가죽 표지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제단 옆에 놓인 작은 은검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었다.

“아애라,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언니가… 언니가 너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할게.”

차갑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오랜 운명에 대한 선언이었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졌다. 관측소의 돔형 천장이 서서히 열리며, 눈보라가 섞인 차가운 겨울 공기가 내부로 들이닥쳤다. 그 너머로, 수천 수억 년의 시간을 품은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단계로 나아갈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관측소의 육중한 문이 활짝 열렸다. 눈보라를 뚫고 들어온 그림자, 그를 감싼 차가운 공기와 함께 지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은서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제단 위의 촛불, 그녀의 손에 들린 은검, 그리고 그녀의 눈빛.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은서… 안 돼… 제발….”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고통과 절망, 그리고 애원. 그의 눈은 뜨거운 눈물로 물들었다. 은서는 돌아보았다. 지훈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작은 새와 같았다. 그녀의 눈가에도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훈아…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서는 은검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별빛이 은검의 날카로운 칼날에 부딪혀 차갑게 부서졌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제단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날의 약속은, 이 차가운 겨울 눈꽃 아래 산산이 부서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