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지만, 지훈의 심장 소리는 낮처럼 요란했다. 낡은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쓰인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서울의 오래된 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고물상 겸 앤티크 상점이었다. 상점의 간판은 희미한 불빛 아래 ‘추억 담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자가 닳고 닳아 지훈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서연과 함께 나눴던 마지막 여름, 지훈이 서툰 손으로 직접 깎아 선물했던 작은 오르골. 멜로디는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서연은 오르골을 들고 해맑게 웃었었다. 그 오르골이 이 상점에 팔렸다는 제보를 받은 것은 며칠 전이었다. 반신반의했지만, 작은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에 지훈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상점의 문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하게 선반과 바닥을 채우고 있었고, 퀴퀴한 공기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쪽에서 바느질을 하던 백발의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흐렸지만, 그 안에 담긴 연륜은 어떤 날카로운 것보다도 지훈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어서 와요, 젊은이. 뭘 찾으러 왔소?”
지훈은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오르골 사진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낡고 바랜 사진 속에는 스무 살의 서연이 오르골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지훈에게 수만 가지 상상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아이고, 이 오르골 말인가.” 할머니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다. “기억나지. 아주 독특한 오르골이었거든. 손수 깎은 티가 역력했지만, 멜로디는 그 어떤 비싼 오르골보다 아름다웠어. ‘별이 빛나는 밤에’… 맞지?”
지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그 오르골이었다. “네… 맞습니다. 할머니, 이 오르골을… 서연이가 팔았나요? 언제쯤… 누가 가져왔는지 아세요?”
할머니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젊은 아가씨는 아니었어. 한 일 년 전쯤 될 거야. 아주 곱고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가져오셨지. 그분은 이걸 팔러 오신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 ‘잃어버린 멜로디’를 되찾아 줄 다른 방법을 찾는다고 하셨어. 그러다 이걸 보시고는… 사 가셨지.”
지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서연이 팔지 않았다고? 그럼 그 오르골은 어디에 있다가 이 상점으로 온 걸까? 그리고 그 ‘잃어버린 멜로디’를 찾는다는 할머니는 누구였을까? 절망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서연이 이젠 자신과의 추억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오르골이 그녀의 손에 있지 않다는 더 큰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사 가셨다고요? 어떤 분이… 왜 사 가셨는지….” 지훈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할머니는 지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딱한 사연이 있어 보였어. 그분이 그러셨지. 병원에 계신 어린 손녀에게 줄 선물이라고. 손녀가 몸이 많이 안 좋은데, 음악을 무척 좋아하고, 이 오르골에서 나는 멜로디가 ‘잃어버린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그래서 꼭 주고 싶다고 하셨어. 병원이 어디인지는 말 안 하셨지만, 손녀의 꿈이 건축가라고 했던가…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이 너무 멋져서, 매일 스케치를 한다고 하셨지. 그리고… 그 손녀가 자꾸만 당신의 잃어버린 딸을 닮았다고 하셨어. 젊은 아가씨… 사진 속 이 아가씨를 닮았다고.”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거세게 요동쳤다. 병원? 어린 손녀? 그리고 잃어버린 딸, 사진 속 서연을 닮았다는 말까지. 모든 조각들이 뒤섞여 새로운 퍼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연이 병원에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가족일까?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는 새로운 방향을 찾은 듯한 희미한 희망을 느꼈다.
할머니는 지훈의 손에 따뜻한 차 한 잔을 쥐여주며 말했다. “추억은 물건에 담기지만, 그 마음은 사람에게 담기는 법이야. 멜로디가 닿을 곳은, 아직 찾아야 할 거야.”
상점을 나선 지훈은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뜨거웠다. 오르골은 사라졌지만, 그 멜로디는 새로운 실마리를 남겼다. 병원, 건축을 꿈꾸는 어린 소녀, 그리고 서연을 닮았다는 한 할머니의 잃어버린 딸. 214화의 끝에서, 지훈은 한층 더 복잡하고 가슴 아픈 추적의 실마리를 움켜쥐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지만,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