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고요하던 할아버지 댁은 희미한 아침 햇살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지난밤, 오래된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져 있던 증조할아버지의 빛바랜 일기장을 펼쳐든 후부터, 나의 마음은 거친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바람의 고개, 그 너머에 시간이 잠들다’라는 알 수 없는 문구와 함께,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조악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그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바람의 고개’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고 음침한 전설이 서린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전설은 내게 더 이상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루로 나섰다. 댓돌 위에는 할아버지의 낡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새벽부터 텃밭을 매러 가셨을 것이다. 그 특유의 부지런함은 7080화쯤부터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부엌에서는 벌써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겨왔고, 옆방에서는 사촌 동생 서연이가 곤히 잠든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서연이는 어제 일기장을 보며 내 곁에서 함께 숨죽였던 유일한 증인이자, 나의 가장 든든한 조수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여름에 이런 날씨는 흔치 않은데. 오늘 같은 날, 굳이 ‘바람의 고개’로 향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잠시 망설였지만, 증조할아버지의 마지막 글귀가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간이 잠들다.’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빛나는 돌이 숨겨져 있다는 오래된 마을의 전설과 관련이 있을까?
새벽의 결심
“오빠, 벌써 일어났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서연이가 눈을 비비며 방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잠이 덜 깬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밤새 나만큼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일곱 살 어린 서연이는 겉보기와 달리 강단 있는 아이였다. 특히 호기심이 발동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응… 잠이 안 와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서연이는 내 옆으로 다가와 창밖의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비 올 것 같아.”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서연이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증조할아버지의 마지막 글귀가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서연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왠지 오늘은 꼭 가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께서 늘 ‘바람의 고개’는 위험하다고 하셨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거라면… 분명 뭔가 중요한 게 있을 거야.”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이 조금은 옅어지는 듯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우리는 할아버지 몰래 배낭을 챙겼다. 비상용 랜턴, 낡은 나침반, 그리고 할머니가 직접 싸주신 주먹밥 몇 개. 든든한 준비물과 함께 우리는 할아버지의 낡은 트럭이 사라진 후, 집을 나섰다.
바람의 고개로 향하는 길
집을 벗어나 마을의 좁은 흙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숲이 시작되는 입구는 늘 그랬듯 울창하고 평화로웠다.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익숙한 길을 지나 점차 숲 속 깊숙이 들어서자, 공기의 습도가 높아지고 나무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오빠, 저기 봐!”
서연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바위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이 있었다. 어릴 적 이 길을 지나며 보았던 것과는 달리, 오랜 세월 풍파에 닳아버린 문양은 이제 겨우 희미하게 형태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증조할아버지의 일기장에 그려져 있던 지도 속의 첫 번째 표식이었다.
“맞아, 여기부터가 증조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길이야.”
나는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낡은 나침반의 바늘은 미세하게 떨리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길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풀과 덩굴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마치 이곳이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증명하듯이.
숲의 풍경은 이내 낯설게 변해갔다. 나무들은 키가 더 커지고 가지들은 얽히고설켜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는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오빠, 정말 길이 맞을까?”
서연이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니, 작고 여린 손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나 역시 불안했다. 어릴 적에는 그저 모험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숲이, 지금은 거대한 미지의 존재로 다가왔다.
“괜찮아, 서연아. 증조할아버지께서 이 길을 가셨을 거야. 우리도 갈 수 있어.”
나의 말에 서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큰 의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대어 한 걸음씩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거센 바람의 협곡
한참을 걷고 또 걸었을까, 갑자기 숲이 끝나고 거대한 바위들이 솟아오른 협곡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바람의 고개’였다. 거대한 바위 절벽들 사이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바위들은 날카롭게 깎여 있었고, 간간이 굳건하게 뿌리내린 고목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강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와… 바람 진짜 세다.”
서연이가 모자를 움켜쥐며 말했다. 바람은 상상 이상이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한 바람이 우리를 뒤로 밀쳐냈다. 일기장에 그려진 지도는 이 고개를 지나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협곡의 바위들을 조심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틈 사이로 가느다란 넝쿨들이 자라나 있었지만, 그마저도 바람에 흔들려 잡기 쉽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으며, 나는 서연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발아래로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빠, 비 와!”
서연이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설상가상으로 굵어진 빗줄기는 바위를 미끄럽게 만들었고, 시야를 가렸다.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잠깐 쉬자! 저기 바위 밑에.”
나는 절벽 중간에 있는 작은 바위 동굴을 발견하고 서연이를 이끌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바위 밑으로 피하니, 잠시나마 거센 바람과 빗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차가운 바위틈에 몸을 기대자, 온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서연이는 숨을 헐떡이며 내 어깨에 기대왔다.
“오빠, 무서워…”
나 역시 두려웠다. 이렇게 위험한 곳을 증조할아버지는 대체 왜 오셨던 걸까? 일기장에 단 한 줄로 쓰여 있던 그곳이 이렇게 험난한 곳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기대어 앉았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때렸다.
오래된 표식, 새로운 단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빗줄기가 약해지고 바람도 조금 잦아들었다. 우리는 다시 움직일 채비를 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굴 안쪽 바위 벽에 희미한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옅은 자국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이 머물렀다.
나는 랜턴을 켜고 벽에 비춰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자연적인 자국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새겨진 흔적이었다. 작고 둥근 문양이 여러 개 이어진 형상. 증조할아버지의 일기장 뒷부분에 그려져 있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라’라는 글귀 아래에 있던 그림과 똑같았다.
“서연아, 이거 봐!”
나는 흥분하여 서연이를 불렀다. 서연이도 눈을 크게 뜨고 문양을 바라보았다. “오빠, 일기장에 있던 그림이랑 똑같아! 증조할아버지께서 여기에 오셨던 거야!”
문양을 따라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가자, 한곳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깊게 파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눌러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눌러보니,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깜짝 놀란 나는 숨을 멈췄다. 서연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바위 틈새로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후텁지근하고 오래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지의 공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곳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다.
“여기가… 증조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시간이 잠든 곳’일지도 몰라.”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랜턴을 통로 안쪽으로 비춰 보았다. 통로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늘 ‘바람의 고개’ 너머에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고 하셨던가. 어쩌면 그 미지의 세계가 바로 이곳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증조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더 깊은 미지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들어서야 할 순간에 놓였다. 우리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