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 낡은 커튼을 미약하게 흔들었다. 침묵 속에서, 오직 숨소리만이 살아있는 것들의 증거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훈은 세연의 앙상한 손을 잡고 있었다. 온몸의 무게가 손끝에 실린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의 숨은 이제 한숨보다 가늘었고, 피부는 백지장처럼 투명했다.
테이블 위, 낡고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시계는 느리게, 그러나 집요하게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지난 세월, 수많은 밤을 지훈과 함께 보낸 그 시계는 이제 희미한 금이 여러 갈래로 퍼져 있었다. 마치 뼈가 드러난 손등처럼, 그 금들은 시계의 본체 깊숙이 박혀 있는 듯했다. 지훈은 그 금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영혼에 새겨지는 균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지… 훈…”
세연의 목소리는 실낱 같았다. 지훈은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격렬하게 울렸다. 이 순간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나… 이제… 힘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여진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는 그에게 ‘멈춰달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수척해진 얼굴로 거울을 보며 “이게 몇 번째일까”라고 읊조리거나, 때로는 잠든 지훈의 손에 들린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슬픔을 드리우곤 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훈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시계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부르는 듯한, 간절하고도 비통한 빛이었다. 250번의 되감기. 그의 기억 속에는 이제 온전한 시간의 흐름이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 시계를 사용했을 때의 이유, 세연의 어떤 질병 때문이었는지조차 희미해졌다. 그저 그녀가 고통받고, 자신이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만이 지훈의 심장을 지배할 뿐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거울에 비친 흐릿한 상처럼 아른거렸고, 어떤 기억들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친구들과의 추억, 부모님의 얼굴, 심지어 세연과 처음 만났던 설렘마저도 조각조각 부서져 그의 정신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기억, 세연의 미소만은 어떤 되감기 속에서도, 어떤 균열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그것이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아질 거야, 세연아.”
지훈은 자신의 말을 믿으려 애썼다. 그는 테이블 위 시계로 손을 뻗었다. 시계의 차가운 금속은 그의 손끝에 닿자마자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마치 오랜 세월의 피로가 쌓여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시계의 태엽은 이미 수없이 되감겨 너덜너덜해진 실타래 같았다. 한 번만 더, 단 한 번만 더 돌리면… 어쩌면.
그의 손이 태엽에 닿으려던 찰나, 세연의 작은 손이 그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놀랍도록 강한 힘이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한 눈동자 속에는 짙은 체념과, 동시에 지훈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만… 해…”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너무나 희미해서, 지훈은 자신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 속에서 간신히 그녀의 말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숨은 점점 더 가늘어졌다. 공포가 그의 목을 조여 왔다. 그는 시계를 다시 붙잡으려 했다. 시간을 되감아 그녀의 고통을 멈추고 싶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전부인 세연이, 그의 기억 속 유일한 불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제발… 세연아…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지훈은 울부짖었다. 그의 눈물은 세연의 창백한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세연은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그녀의 입술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지훈이 가진 모든 기억 중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미소였다.
“사랑… 해…”
그녀의 마지막 말은 바람처럼 스러져갔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온몸이 경련하는 듯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보았다. 금이 간 시계는 이제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차갑고, 죽어 있는 듯했다.
과거의 지훈이었다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계의 태엽을 돌렸을 것이다. 250번의 되감기는 그에게 실패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희망과 강박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세연의 마지막 미소와 그녀의 ‘이제 그만’이라는 말은 그의 오랜 강박을 깨뜨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그리고 시계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훈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세연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온이 식어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 고통은, 그 어떤 시간을 되감아도 피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잔혹한 현실.
그는 흐느끼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세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테이블 위 시계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엽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계를 가만히 들었다. 금이 간 시계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무겁고, 차가웠다.
“미안해, 세연아… 그리고… 고마워.”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는 시계를 꼭 쥐고,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멀리 동이 터오고 있었다. 붉은 여명이 지평선을 물들이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지훈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시계는, 세연의 마지막 소원과 함께 영원히 멈춰버렸을지도 모른다.
지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지난 250번의 시간이 아닌, 앞으로 다가올 알 수 없는 시간들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 시간들은 세연이 없는 시간이었고, 기억이 조각난 시간이었으며,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찬 시간일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더 이상 무한한 반복 속에 갇히지 않는, 온전한 그의 시간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 바람이 방 안을 휘감았다. 지훈은 손에 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오랜 강박에서 벗어난 듯한, 미약한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는 시계를 꼭 쥔 채, 떠오르는 해를 응시했다. 이제 그는,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251번째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